윤소평
직장에서 '나'를 대신할 수 없도록, 대체불가능한 사람이 되는 것은 누구나의 바램일지 모른다. 회사나 조직이 '나'의 가치를 알아주고 '나'의 공백이 업무프로세싱에서 일정한 장애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경우, '나'는 짤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대체불가능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경우, 항상 '일복'에 시달린다. 외근을 다녀오거나 휴가를 떠났다가 복귀한 경우, 그 대체불가능성 때문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다. 일 때문에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 때문에 휴식을 취했다고 하더라도 복귀 시점부터 업무모드로 급전환해서 업무처리를 해야 하는 피로와 스트레스는 휴식 전보다 더 할 수 있다.
대체불가능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이유는, 직장과 일자리의 보전 때문이다. 사정이 어려우면 대체가능한 사람부터 정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체불가능성이 가져오는 피로 때문에 가끔은 '나' 없이도 한시적으로 일이 잘 돌아가기를 원하기도 한다. 다만, 내가 담당했을 때보다는 덜 좋은 결과로 일처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그런데, 사실 대체불가능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고 하더라고 과연 실제로도 대체불가능할까?
회사나 조직이 능력있는 한 개인을 필요로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회사나 조직은, 사활이 그 개인에게 의존당하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 결국, 특정 개인이 영원히(?) 그 회사나 조직에서 없어질 경우, 회사나 조직은 그 공백을 메울 다른 인력을 충당한다.
다만, 충당된 인력이 대체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사람보다 업무성과가 좋지 않을 수 있겠지만, 결국, 회사나 조직은 돌아가게 되어 있다.
여기서 고민에 빠진다. 대체불가능하다고 인식되었으면 하는 바램과 그렇다고 너무 많은 일에 시달리고 싶지 않은 바램이 모순적으로 발생한다. 가장 행복한 상황은 '나'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회사나 조직에서 적당히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를 언제든지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나'를 대하는 회사나 조직은 비젼이 없는 것이고, '나'없으면 안 된다는 교만과 오만도 가져서는 안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도 하나의 자본일 뿐이다. 그저 바라기로는 '나'의 가치를 타인, 회사, 조직이 적정선에서 인정해 주고, '나'의 부재가 그들에게 적정선에서 불편함을 가져다 주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