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평변호사
플라톤 대화편 [라케스 Laches]편에 보면, 아테네 두 장군 라케스와 니시아스가 소년들에게 갑옷을 입혀야 하는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이다가 답을 얻기 위해 소크라테스를 찾아간다. 라케스는 갑옷을 입히지 말아야 한다는 쪽이고, 니시아스는 갑옷을 입혀야 한다는 쪽이다.
소크라테스 : 훈련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요?
라케스, 니시아스 : 용기를 북돋기 위해서 입니다.
소크라테스 : 용기는 무엇인가요?
라케스 : 영혼이 무엇인가를 견뎌 내는 힘입니다.
소크라테스 : 견디는 것보다 후퇴, 오히려 도주를 하는 것이 더 용감한 행동일 때도 있지 않나요? 게다가 견디는 것이 어리석은 경우도 있잖아요.
라케스 : 그럼, 지혜롭게 견뎌 내는 힘입니다.
소크라테스 : 용기가 반드시 지혜와 연결되어야 하는 덕목인가요? 지혜롭지 못한 목표를 추구할 때 보이는 용기를 찬양할 때도 있지 않나요?
니시아스 : 전쟁을 비롯한 그 어떤 상황에서도 무얼 두려워하고 무얼 희망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 용기입니다.
소크라테스 : 미래에 대해 완벽한 지식이 없더라도 용기를 내는 것이 가능하지 않는가요?
두 장군은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 하고, 위 상황은 이쯤에서 종료된다. 용기에 대한 정의를 내려야 하는 몫은 대화의 청자나 독자의 몫이다.
하버드 의과대학 보건대학 교수인 아툴 가완디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책에서
용기란 무얼 두려워하고 무얼 희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지식을 직면할 수 있는 힘을 뜻하고, 지혜란 분별력 있고 신중한 힘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삶에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고, 무얼 두려워하고 무얼 희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실을 찾으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보다 더 어려운 용기는 우리가 찾아낸 진실을 토대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용기라고 그는 언급하고 있다.
무엇을 두려워 하고 무엇을 희망하는가? 그리고, 그러한 앎을 행동으로 취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