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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7 행주대첩

윤소평변호사

by 윤소평변호사
1593년 7월 13일 을축. 맑음
늦게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광양과 두치 등지에는 적의 꼴을 볼수 없다고 한다. 흥양 현감(배홍립)이 들어왔다. 우수사도 왔다. 순천 거북선 격군이며 경상도 사람인 종 태수가 도망가다가 잡혀 왔기로 처형했다. 늦게 가리포가 보러 왔다. 흥양 원이 들어와서 두치의 거짓 소문과 장흥 부사 유희선이 겁내던 일을 전했다. 또 말하기를, 자기 고을 산성 창고의 곡식은 남김없이 나누어 주었고, 해포(충남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에 백중 콩 40섬을 보냈다고 한다. 또 행주의 승첩*을 말했다. 저녁 8시쯤 이억기가 청하므로 나서서 그의 배로 가 본 즉, 가리포 영공이 몇가지 먹음직한 것을 차렸다. 날이 샐 녘에 헤어졌다.



1593년은 선조 26년, 이순신 장군의 나이가 49세인 계사년이다.


1593년 2월 12일경 권율 장군이 행주대첩으로 승리하는데, 육군으로서는 희귀한 승리였고, 고무적인 승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왜장 우키다 히데이에, 이시다 미쯔나리 등이 부상을 입고 퇴각했다. 아군은 행주치마로 불리는 부녀자들을 비롯한 민관합동으로 인해 승전했는데, 무엇보다 화차의 위력이 승리의 한 요인으로 분석된다.


'월사집'에 의하면 전남 장성 변이중이라는 자가 사재를 털어 화차 300대를 제작하여 권율 장군에게 40대를 나누어 보내 행주산성의 전투를 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일보 1978년 10월 14일자 논설위원 송지영의 '변이중 선생'기사에 의하면, 변이중의 이러한 화차 제작과 관련하여 기교와 재주를 부려 악한 짓을 하였다는 이유로 조정으로부터 처벌을 받는다.


변이중은 1593년 6월 권율 장군에게 서신을 보내는데, "~~영감님의 마음과 힘으로도 면할 길이 없으니 인정의 남을 헐뜯고 비방함이 이렇듯 심합니다그려.~~~"라고 하면서 자신의 원통함을 토로했다고 한다.


전시에 드러나는 많은 재능있는 자들의 재능에 대해 당시 정부는 시기하고, 견제하는데 급급한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 장군도 지속적으로 조정으로부터 견제받고, 그가 득세할까를 염려해 고문하고, 좌천시키고, 백의종군토록 한다.


국가의 예산을 지원해 주지도 않는 상황에서 일반 국민이 개인 재산을 들여 화차를 만들고, 각종 병기를 만들어 적을 맞아 싸웠다면 이를 높이 치하하지는 못할 망정 무군지죄로 치부하고, 죄를 만들어 처벌함으로써 정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기성 정치인들은 왜란을 물리치는 기간을 더 길게 만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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