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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평변호사 Mar 27. 2016

대전역 3분 정차, 가락우동

윤소평변호사칼럼

8세인가 그 이전인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구리 료헤이의 우동한그릇과 같은 경험이라고 말하면 부끄러울 수 있는 이야기다.


집안 사정이 너무 좋지 않았던 탓에 나의 아버지는 대전에 사는 동생, 나에게는 작은 아버지이자 삼촌에게 돈을 꾸러 가야 했다. 추운 겨울에 통일호(지금은 없는 열차이름이다)를 타고 대구에서 대전으로 갔다. 나의 아버지는 돈을 동생으로부터 빌리는 상황에 왜 나를 개입시켰는지 지금도 알 수는 없다.


다만, 나의 아버지가 동생으로부터 돈을 빌리는 것이 '쪽'팔리는 상황이었는데, 아들인 나를 동석시키면 그 과정이 좀 더 수월할 거라고 나의 아버지가 생각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 나의 추측이다.


여하튼 늦은 저녁에 나의 아버지와 나는 대전에 도착했고,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어떤 식으로 연락이 되었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작은 아버지는 중국식당에서 나의 아버지와 나에게 짜장면과 무언가를 사 주고는 한참을 기다리게 했다.


중국식당도 퇴근이 있는 것이라 나의 아버지와 나는 부득이 중국식당의 온기로부터 벗어나야만 했다. 대전 어느 초등학교 담벼락에서 나의 아버지와 나는 상호의 온기로 작은 아버지가 가져올 차용금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기라디다 보니 깜깜한 밤이 되었다. 대전과 대구가 이렇게 먼 거리라는 생각을 그때서야 하게 되었다. 나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춥다는 생각밖에는 없었고, 나의 아버지가 곁에 있으니 담벼락에 의지하면서 냉한 북서풍을 요리조리 피하기만 했던 것 같다.


나의 아버지는 작은 나의 손을 잡고, 작은 아버지에게 인사를 했고, 대전역에서 대구로 가는 기차표를 끊고 대구로 향하는 통일호에 나를 태웠다. 하지만 짜장면을 먹은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 9시 뉴스가 끝날 무렵이었으니 나는 또 배가 고팠다.


나의 아버지는 나에게 배고프지라고 물었고, 그렇다고 철없이 대답했다. 나의 아버지는 어딘가로 갔다 왔는데, 마이크로폰에서 이제 곧 열차가 대전역을 출발하니 탑승객은 제자리를 찾아 앉으라고 안내방송을 했다. 아직 한글을 듬성듬성 알고 있던 나로서도 빨리 기차에 타야 한다는 시급함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기차가 살짝 미동을 하며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나의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두려웠다. 법정대리인이 없다는 것이 순간 절대적인 외로움을 안겨 주었다고나 할까. 작은 키를 늘려서 창밖을 보았다. 나의 아버지가 내가 너무 작은 탓에 찾지 못할까 최대한 몸을 늘렸다.


기차는 출발했다. 순간 두려움은 너무나 커졌다. 나의 아버지가 없이 대전에서 대구집까지 찾아간다는 것이 나는 해 본적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여 8살이 할 수 있는 온갖 고민을 다 끝낼 무렵 나의 아버지는 상체가 반쯤 젖은 상태로 철간문을 열고 나에게 다가왔다. 김이 모락나는 가락우동을 한 손에 들고 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누군가 처음에 나의 아버지가 구매한 가락우동을 들고 오는 틈에 부딪혀서 그 가락우동은 바닥으로 사라졌고, 나의 아버지의 아들인 내가 허기를 호소하니 그것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우동을 쏟게 한 행인과 조정을 하였을 것이고, 새로운 가락우동을 사느라 나를 한동안 방치시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나의 아버지가 내게 안겨준 두려움에 대한 원망은 사라지고, 가락우동이 주는 짭조름함에 한없이 면발을 들이켰다.


시간이 좀 지난 후에 대전역에서는 3분 가량 열차가 정차하고 가락우동의 판매로 상당한 매출을 홍익회가 취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기차를 별로 이용하지는 않는다. 지방 재판이 있더라도 비행기를 이용하거나 재판 전날 그 지역으로 내려가 지인들을 만나곤 한 후 익일 재판에 출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나의 아버지에 대해 불만을 품고 살았던 나는 대전역을 지날 때면 나의 아버지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에게 가락우동을 먹이고자 했던 그 사랑이 추억된다. 지금은 내가 아버지가 되었고, 이마트에서 판매하는 가쓰오 우동을 가끔 아이들과 끓여 먹는다. 우동집이 거의 없는 지금, 집에서 손쉽게 끓여 먹는 우동면발을 보면, 나의 아버지가 돈이 없으면서도 나에게 먹고 싶어하는 것을 먹이고자 우동국물을 덮어쓰고 내게 주름진 미소를 보여주었던 그 사랑이 가끔은 이제는 결코 겪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는 것이 못난 그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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