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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Jan 03. 2024

삼월의 폭설

도시 스케치_펜실베이니아 턴파이크

동쪽으로 가는 길의 시작은 평화롭고 한가했다. 어쩌면 지루하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릴 정도로 끝없는 평야가 이어졌다. 아스팔트 도로의 멀리 끝에는 아지랑이 같은 게 피어올랐다. 복잡하지 않고 휘어지지도 않은 길이 주는 무료함으로 졸음이 몰려왔다. 


끝없이 펼쳐지는 지루한 평야 지대를 지나서 이제는 계속 산을 돌아 오르는 길이다. 이 산을 넘으면 거대한 도시에 정말 다 와가는 거였다. 여정의 삼분의 일 정도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계획은 처음의 계획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때 그걸 모르지도 않았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계획을 하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비정상적인 일이 발생할 때가 있는데 그때는 그런 경우가 인생에서 종종 있다는 걸 전혀 몰랐다. 나는 어렸고 천재지변에 대해 전혀 경험하지 못해서 별로 의식하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하다. 


날이 어두워오는데 점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설마 삼월 중순인데 눈이 많이 올까 생각했지만 점점 눈은 함박눈이 되어 끝없이 내렸다. 와이퍼를 최대한으로 빨리 움직여도 앞 유리창에 떨어지는 눈의 양을 감당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차의 창문에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이런 경우는 정말 처음이었다. 눈의 밀도와 내리는 속도가 차의 앞유리창을 닦는 와이퍼의 속도보다 훨씬 더 빨라서 눈이 쌓이고 쌓였다. 게다가 기온이 얼마나 낮은지 와이퍼에 들러붙은 눈이 얼기 시작했다. 이제 앞은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고 길은 산길이었다.


꼬불거리는 산길을 올라가다가 커브를 도는데 갑자기 차가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핸들을 돌리는 것과는 상관없이 차는 계속 미끄러져서 길의 가장자리 펜스를 들이받을 기세였다. 기어를 바꾸어도 차는 혼자 앞으로 갔다. 길을 벗어나 빽빽한 소나무가 있는 숲으로 굴러 떨어지기 직전에 펜스 앞에서 간신히 차가 멈췄다. 


정말 죽을 뻔했다는 생각을 하는데도 눈은 계속 내렸다. 빽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도로 한복판에서 차를 두고 갈 데도 없었다. 계속 가야 했다. 날은 춥고 눈은 무섭게 내렸다. 멈출 수 없는 길이었다. 마치 게임을 시작했는데 앞만 보이고 앞으로 가는 버튼만 있는 그런 입장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차를 몰았는지 모르지만 커브길을 돌고 돌아서 산길을 내려와 이름 모를 도시의 출구표지판이 보였다. 그리고 좀 더 지나자 경찰들이 나와서 도로를 막고 차를 세우고 있었다.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했다. 이 마을로 들어가서 하룻밤 자고 가라고 했다. 임시로 마련한 학교 체육관으로 가서 자거나 모텔에 가서 자야 했다. 다행히도 오랫동안 쓰지 않던 모텔에 마지막 방이 하나 남아있었다.

 

저녁을 먹으려고 상점들이 모여있는 동네의 가장 번화한 곳으로 갔다. 눈은 계속 내렸고 밥을 먹고 나오자 차가 눈에 쌓여있었다. 눈을 대충 치우고 길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뒷바퀴가 눈에 미끄러져서 차는 헛바퀴만 굴렸다. 습기를 듬뿍 머금은 눈은 다시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거대한 슬러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때 동네 주민이 나와서 차를 빼주겠다고 했다. 운전석 아래에 있는 발매트를 뒷바퀴 뒤에 깔았다. 그리고 그 위로 후진을 하다가 급하게 다시 기어를 바꿔서 전진을 했다. 차가 튕겨져 나왔다. 차의 트랜스미션에는 아주 안 좋은 것 같았지만 시골 동네에서 눈이 올 때는 이런 식으로 차를 빼는 것 같았다. 이런 날씨에 익숙한 것 같았다. 하긴 동네 사람들은 눈이 길에 그렇게 쌓여있는데도 픽업트럭을 거의 전 속력으로 몰고 다녔다.

  

모텔로 돌아오니 방은 너무나 추워서 시트까지 다 뒤집어써도 추위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손과 발이 시리고 입을 다물고 있어도 이빨이 서로 부딪혔다. 그러다 어떻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나는 얼어 죽지 않고 살아났다. 온몸이 쑤셨다. 하지만 창밖으로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그 작은 마을을 뒤덮던 눈이 빠르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어제의 그 눈폭풍은 영화를 본 것처럼 거짓말같이 사라져 있었다. 


다시 움직였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그 많던 눈은 거의 다 사라져 가고 없었다. 그렇게 위험천만하던 길이었는데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말짱해지고 있었다. 만약 어제 그 눈길에서 사고라도 일어났으면 얼마나 허무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산을 돌고 도는 길을 넘어갔다. 


나는 그때 삼월의 거대한 눈폭풍을 길 위에서 만나고 용기를 한껏 장착했다. 그때부터 나는 어디로 가든 길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때 왠지 사람은 운명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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