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맛의 성장_김치
겨울이 다가오는지 제법 바람이 차가워진다. 집마당 수돗가 한편에 배추가 쌓여있다. 그리고 집안의 거실에는 커다란 양재기에 잘 닦여진 무가 한가득 있다. 어머니는 저녁을 먹고 무채를 썬다. 나는 옆에서 티브이를 보다가 어머니가 썬 무채를 조금 집어 먹는다. 어머니는 팔이 아프다고 나에게 채칼을 가져와서 무채를 가는 법을 알려준다. 나는 처음에는 신이 나서 무채를 갈아댄다. 그런데 정말 하나를 다 갈기도 전에 팔이 아프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 많았던 무는 부엌 한 편의 큰 양재기에 하얀 무채가 되어 보자기에 덮여 있다. 학교에 갔다 오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배추에 김장 속을 넣고 계셨다. 집안이 복잡한 걸 싫어하는 나는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서 따뜻한 방바닥에서 뒹굴 거리면서 숙제를 하다 잠이 든다. 저녁 먹으라는 소리에 잠에서 깨면 밥상에는 배춧국과 김치 속 쌈이 있다.
김장이라는 집안의 행사가 지나가고 겨울 방학이 되면 어머니는 가끔 뒷마당에 나가서 커다란 김장독에서 김치를 꺼내오셨다. 나는 배추김치보다는 그 옆에 묻어둔 무김치를 좋아했다. 배추김치가 뭔가 치장을 많이 했다면 무김치는 그냥 별 치장이 없고 차갑고 시원했다. 어릴 적에는 사시사철 김치가 밥상에 올랐다. 하지만 내 기준으로 김치는 겨울 음식이다. 특별히 김치를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다른 계절의 김치에 대한 정확한 기억은 없다. 추석 때 먹던 나박김치나 여름이 올 때쯤 오이소박이김치정도가 생각난다. 오이소박이나 나박김치는 특별한 반찬에 가까웠다. 나는 김치는 안 좋아해도 오이소박이는 아주 좋아했다.
밥 먹는데 김치가 없어도 별로 영향을 받지 않던 나는 유학생활중에 먹는데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한식을 먹지 않아도 괜찮고 먹으면 좋고 그런 식이었다. 그래도 한국 식품점에 가면 기본으로 김치 한 병은 항상 사 왔다. 꺼내 먹기도 귀찮아서 냉장고 구석에 넣어두고 잊어버린다. 그러다가 먹을 게 없을 때 김치볶음밥을 해서 계란프라이를 올려 먹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스테이크를 구워서 김치와 먹게 되었다. 야채도 없고 해서 김치와 같이 먹었는데 조합이 좋았다. 밥하고 먹는 김치보다는 스테이크와 먹는 김치가 맛이 좋았다. 스테이크에 별 다른 소스를 뿌리지 않고 참기름을 뿌린 소금을 조금 찍어서 먹는다. 그러다가 가끔 김치를 먹으면 배추의 시원한 맛이 좋았다. 그때부터 김치를 좋아하게 되었다.
한국에 와서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면 김치가 안 나오는 식당이 없었다. 그렇지만 김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식당에 나온 김치를 거의 먹지 않았다. 중국산 김치에 대한 안 좋은 뉴스도 많이 나오고 해서 편견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먹던 시원한 맛이 아니고 양념이 많고 짠맛이어서 먹고 싶지 않았다. 어느 날 영국인 사장과 함께 골프장에 갔다. 그늘집에서 짜장면을 먹었다. 앞에 앉은 사장이 짜장면을 다 먹기도 전에 김치 한 접시를 금방 다 먹었다. 김치를 더 시켰다. 김치가 발효 음식이라서 맛을 알게 되면 중독성이 있는데 확실히 입맛이 많이 개방적이었다. 일행 중에 한국 사람은 나 하나고 나머지는 미국인이었다. 김치를 가져온 종업원이 내 쪽에 접시를 놓자마자 사장이 김치 접시를 끌어다 자기 앞에 놓고 먹었다.
요즘은 가끔 안 먹던 김치가 먹고 싶어 진다. 열무김치는 풀맛이어서 거의 먹지 않았다. 게다가 국물도 질척거리고 있고 어른들이 먹는 김치로 생각하고 잊고 지낸 지 오래다. 그런데 요즘은 그 풀이 먹고 싶어서 열무김치를 사기도 한다. 집에서 해줄 때는 먹지도 않던 김치다. 과거에 쌓아둔 입맛의 재검점 시기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