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일기_4월 익선동
4월 말이지만 낮에는 여름처럼 더웠다. 지하철 역을 빠져나오자 네이버 지도에서 봤던 것과는 다르게 길을 찾기가 참 애매했다. 반듯하고 군더더기 없는 네이버지도에 비해 현실의 오래된 지역 실물은 난해했다. 특히나 예상보다 너무 많은 사람들과 이것저것들이 길 위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지역을 중고등학교 시절에 자주 들낙 거렸고 근처에서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하면서 맛집과 명소를 다 알고 있었다. 아무리 요즘 내가 강북을 자주 다니지 않는다고 해도 금방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지도를 보면서 죽 따라 걸어 올라가는데 이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다. 아까 지하철 입구에서 나와서 처음에 망설이면서 지나친 비스듬히 뻗어있던 좁고 낡은 골목으로 가야 했던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왔던 길을 내려가서 좁은 길을 찾아 올라갔다. 예상대로 내가 찾던 장소가 나왔다.
내가 헤매느라고 십 분을 소비하는 동안 약속을 한 지인은 이미 나에게 도착했는지 문자를 보내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길을 잃어버려서 헤매느라 늦었다고 주절 거리는데 갑자기 내가 이곳에 사는 현지인이고 지인이 십 년 만에 미국에서 나온 사람인데 입장이 바뀐 느낌이 들었다.
동네 구경을 하면서 걷다가 저녁 먹을 곳을 찾아 들어가기로 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걷는데 나는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려서 어느 쪽으로 갈지 몰랐다. 내가 알던 종로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 온 것 같았다. 그런데 다행히도 지인은 나보다 더 길을 잘 알아서 이쪽저쪽으로 잘 다녔다.
오후 다섯 시인데 너무나 더웠고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나는 그때 유럽에서 삼주정도 있다가 온 지 얼마 안 돼서 시차 때문에 밤잠을 못 자고 있었다. 정말 머리가 맑지 않았다. 그게 내가 종로 뒷골목에서 방향 감각을 잃고 헤맨 핑계였다.
우리는 그래도 어찌어찌하여 세운상가 뒤의 골목에서 시작해서 인사동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돌아와서 익선동을 돌았다. 익선동에 좁은 골목들 사이사이에 한옥을 개조한 카페나 식당을 여러 개 지나쳐도 지인은 선뜻 맘에 드는 가게를 찾지 못했다.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했다. 나는 정신이 몽롱하고 피곤해서 아무 데나 가고 싶었다.
한옥을 개조한 식당들이 있는 골목을 이리저리 구경 다니다가 드럼통 같은 식탁과 둥근 의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고깃집 골목을 발견했다. 지인은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이 여기였다고 했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미 가게들마다 자리가 없었다.
간신히 한 가게에서 안쪽 테이블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고기를 시키고 소주를 시켰다. 고기 굽는 냄새와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꽉 차있었다. 오래전 내가 사원이던 때에는 이런 가게에 회식을 하러 또는 이런저런 핑계로 소주 한잔 하러 자주 다녔던 것도 같았다. 낯설지 않은 분위기였다.
숯 때문에 매캐하면서도 고기의 고소한 기름 타는 냄새가 간간이 느껴져서 입맛이 돌았다. 나는 고기를 먹고 지인은 더운데 소주만 마셨다. 하지만 지인은 연신 기분이 너무 좋다면서 웃었다. 아마도 나와 같이 사원 시절에 이런 곳에서 보냈던 시간이 떠올랐던 것 같았다.
날이 따뜻해지는 저녁이면 회사 뒤편 건물 앞 거리에 간이 의자와 테이블이 죽 펼쳐지고 포장마차가 생겼다. 거기서 마시던 맥주와 골뱅이 생각이 났다. 낮에는 그 많던 의자와 간이 테이블이 때가 낀 주황색의 비닐 포장마차 옆에 쌓여 있었다. 그곳을 지나면 미로같이 좁고 복잡한 골목 사이사이에 오래된 중국집이며 맛집들이 많았다. 집에 일찍 퇴근하는 날이 거의 없어서 아침점심저녁으로 회사 근처가 내 놀이터고 내 부엌이었다.
두 시간 가까이 플라스틱 원통의자에 앉아 있자니 허리가 아파왔다. 자리를 옮기려고 나왔더니 하늘은 어두워지고 길에는 테이블과 사람이 북적거렸다. 나는 이제 방향을 파악했다. 길을 헤매지 않고 종로타워 뒤편을 향해 자신 있게 걸었다. 해가 완전히 저물어서 선선한 바람이 솔솔 불었다. 차들의 불빛이 지나갔다. 나의 역사도 떠올랐다가 지나가고 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