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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May 19. 2024

홀본역에서부터 걸었다

나의 영국 이야기_푸른 회색빛은 아름답다

히드로 공항에서 탄 피카딜리 라인은 텅 비어있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지하철은 여전히 투박하고 낡아 있었다. 하지만 기차를 좋아하는 나는 기분이 좋았다. 자리에 앉아 반대편 빈자리의 붉은색도 핑크색도 아닌 빛 바랜시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차는 덜컹거리고 지하철 답지 않게 환한 빛을 창으로 맞이하면서 벌판 같은 외곽지역을 지났다. 그렇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였다. 사람들이 내렸다가 탔다가 반복하지만 자리는 여전히 많이 비어있었다.  


시내가 가까워오자 점점 자리가 다 채워지고 서있는 사람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인도여자인듯한 젊은 여자가 내 옆자리에 앉아서 눈화장을 하고 있었다. 별로 흔들리지 않는데 아주 신중히 천천히 멈췄다가 다시 하다가를 반복했다. 몇 정거장 지나서 여자가 내렸다. 아직 홀본역까지는 더 가야 한다. 나는 눈을 감았다. 십 년 전에는 어떻게 이 긴 시간을 서서 갔을까? 아마도 처음 찾아가는 곳이라 긴장을 했고 혹시라도 역을 지나칠까 봐 그랬을 거다. 그리고 그때는 내가 지금보다 십 년이나 젊었다.


드디어 홀본역에 도착했다. 지하의 따스한 공기와 습기가 느껴졌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출구를 향해 올라갔다. 지하세계에서 드디어 지상으로 올라오는 해방의 느낌이다. 개찰구는 복잡하지 않았다. 카드를 대고 밖으로 나가자마자 보이는 사거리의 하늘은 태풍이 지나간 듯 투명하고 높았다. 때마침 길 맞은편에서 붉은색의 이층 버스가 천천히 다가오다가 옆으로 지나갔다. 내가 다시 런던에 왔다는 확인서 같은 순간의 이미지였다.


어제 내가 자는 동안 내렸던 비는 곳곳에 물웅덩이로 남아 있었다. 그때도 그랬다. 밤마다 비가 왔다 개이고 거리에 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역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돌아서 길을 따라 걸었다. 길 건너 왼쪽에 내가 묵었던 숙소가 보였다. 한번 쓱 보고 그냥 걸었다.  


방금 전까지도 햇살이 뜨겁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바람이 차갑게 불어온다. 나는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계속 걸었다. 이런 느닷없는 강한 바람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걷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한참을 걷자 성당 쪽으로 가는 길 표지가 나왔다. 십 년 전에는 너무 가까워서 굳이 지하철을 타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걸어 다녔는데 이제는 결코 짧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표지판을 따라 오른쪽으로 접어들었다. 멀리 성당의 지붕이 보였다. 성당의 뒤편으로 들어가서 돌아 큰길이 있는 앞으로 나갔다. 그런데 문득 성당의 관이 멋이 없어 보였다. 곰팡이 인지 때까 계단도 그렇고 테마파크에 있는 모조건물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날은 점점 쌀쌀해지고 하늘에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십 년 전 내가 봤던 성당이 어디에 간 건지 두리번거리며 기억에 있던 장엄하고도 세련된 검은 지붕의 성당 모습을 이리저리 다른 각도에서 찾았다.


미사 시간인지 회의시간인지 복장을 갖춘 신부님들 여럿이 성당 안으로 천천히 줄을 맞춰서 들어가고 있었다. 별로 사진을 찍을 일도 없는데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사진을 찍고 나는 허탈한 마음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무리의 사람들이 여기저기 길을 건너고 사진을 찍으며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나도 밀레니엄다리를 건너기 위해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나에게 건축가와 건축물에 대해 처음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계기를 만들어 준 다리다. 여전히 다리는 스타트랙 같은 공상과학의 세계로 나를 데려다줄 것 같았다.


다리 밑으로는 여전히 거친 강물이 흐르고 있었고 전체적으로 살짝 푸른 회색빛이 도는 무채색 건물들이 강을 따라 죽 펼쳐져 있었다. 여기저기서 다리를 건너다가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사진을 찍었다. 물론 여기서 사진을 찍으면 마치 흑백 사진처럼 나오는 걸 알고 있다.


나는 이 다리에서의 내가 보고 느꼈던 여러 감정과 색감을 어떻게 해서든 저장하고 싶었다. 십 년 전에도 이렇게 점심시간쯤 다리를 어슬렁 거리며 강물을 쳐다보고 하늘도 보고 바람을 실컷 맞았다. 그때와 지금을 같이 포개서 기억에 남겨두고 싶었다.


사진은 그저 풍경을 담아냈지만 나는 사진에 내 기억의 실마리를 저장했다. 바람도 차고 강물도 건물도 어둡다. 지하철, 강, 다리, 바람 그리고 푸른 회색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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