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S May 11. 2024

갑사, 밤 굽는 할머니, 오월

나무와 나_갈참나무

아침 일찍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딱 들를만한 곳은 공주였다. 돌아갈 필요도 없고 내가 가는 길의 중간에 있었다. 주로 남쪽의 도시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공주 마곡사나 계룡산국립공원 표지판도 여러 번 보면서 지나쳤지만 한 번도 방문해 본 적은 없는 도시였다.


전부터 나는 공주에 가면 갑사를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갑사로 올라가는 길이 나무가 우거지고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였다. 검색을 했더니 갑사는 공주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길게 돌아가는 길도 아니고 지나쳐 가는 길이었다. 지금은 오월이고 나무들이 아름다울 때였다.


이른 아침이었다. 계룡산 국립공원 주차장으로 들어서는데 주차장 입구 조그마한 관리소 창문으로 주차요원 아저씨가 손을 내민다. 주차비가 3천 원이다. 주차장은 텅 비어있고 차는 열대도 안 들어와 있다. 나는 그늘에 차를 대고 천천히 나왔다. 깔끔하고 현대적인 주차장은 아니다. 주변에 울긋불긋하게 뭔가 써붙인 현수막들이나 멀리 보이는 상점들이 전체적으로 80년대쯤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와서 내린 기분이 들었다.


갑사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식당들이 즐비하다. 오른쪽으로 조금 걷다가 거기는 완전히 식당들 사이로 가는 길임을 금방 눈치채고 왼쪽으로 계곡을 따라 난 길로 접어들었다. 십 미터쯤 앞에 커다란 채에 군밤을 굽고 있는 할머니가 보인다. 불꽃이 채에서 튄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서 사진을 찍으려다 말았다. 내려올 때 저 군밤을 사야지 마음먹었다.


군밤 굽는 할머니 위로는 나물이나 각종 차들을 가게 앞에 진열해서 파는 상점들인데 이제 막 다들 진열할 채비를 하는 중이다. 군밤 굽는 할머니가 제일 일찍 나와서 일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군밤을 굽는데 시간이 걸리니 일찍부터 준비를 해야 할 터였다.


갑사로 올라가는 길은 오래된 나무들이 양쪽으로 죽 늘어서서 하늘은 녹색의 잎들로 찰랑거렸다. 아지랑이처럼 멀리 길 끝이 녹색의 잎 사이에 작게 보인다. 사람이 없어서 조용하기도 하고 바람도 없다. 그저 이제 막 푸르름을 한껏 장착하게 된 5월의 연한 나뭇잎들이 소리 없이 자기들의 공간을 채우고 있다.


왜 절에는 항상 부처님 오신 날이라든가 광고 현수막들이 여기저기 둘러쳐져 있을까? 무슨 효과를 누구를 상대로 내기 위해 저런 현수막을 곳곳에 둘러쳤을까? 나는 항상 강남 한복판 절부터 남도의 해안 절벽 위에 절까지 그 마케팅 방식이 너무 궁금했다. 마찬가지로 나는 갑사를 둘러보면서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 절에서 잠시라도 같이 내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은 하늘과 오래된 무너질 것 같은 탑정도였다.


서둘러 다시 내려왔다. 사람들이 올라오기 전에 고요한 길을 걷고 싶었다. 내려갈 때는 아래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그러나 아직도 길은 고요했다. 사천왕문을 지나자마자 오래된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명찰을 보니 갈참나무였다. 우리 동네 왕릉에도 갈참나무가 많이 있는데 특징은 키가 아주 크다. 그런데 갑사의 갈참나무는 키도 크지만 나무 둘레가 무척 두껍고 부드러웠다. 먼지 때가 덜 묻어서 그런지 잎의 색도 훨씬 밝고 투명해 보였다.


입구로 내려오는 데 아까 봤던 군밤 할머니가 멀리 보였다. 옆에 지인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면서 밤을 굽고 계셨다. 거리는 이제 오월의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고 80년대의 울긋불긋한 등산로 입구가 펼쳐져있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옆에서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던 아주머니가 밤을 사라고 한다. 얼마냐고 묻자 오천 원이라고 한다. 내가 밤을 달라고 하자 채에 가지런히 껍질을 까놨던 한 무더기의 군밤을 작은 접시에 담는다. 하나 먹어봐도 되냐니까 먹어보란다. 밤은 작지만 노랬다. 수분이 날아가서 맛있을 것 같았다. 역시 한입크기의 밤은 적당히 단맛이 나고 적당히 구워서 약간 아삭거리며 맛이 좋았다.


채에서 접시에 담고 남은 밤이 우르르 철 쟁반으로 떨어졌는데 할머니는 많이 드려야지 하면서 그 밤을 다 봉투에 담아 주셨다. 쟁반에 뒹구는 마지막 한알까지 먹어보라며 또 주셨다. 할머니의 목소리와 미소가 너무 부드러웠다. 좀 전에 본 연한 잎과 부드러운 기둥을 가진 갈참나무가 생각났다. 오월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인데 그런 오월에 딱 들어맞는 오월 같은 순간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구름과 함께 서성거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