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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Aug 28. 2023

향수

도시 스케치_헤로나

오래전에 굉장히 유명했던 소설과 영화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별로 내키지 않아서 사람들의 관심과는 다르게 나는 그 영화나 소설에 대해서 주워듣기만 했을 뿐 직접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도 유명한 소설과 영화라 마치 내가 보고 읽은 것 같이 내 멋대로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 그 영화와 소설을 보고 싶어졌다. 나는 모든 사람이 떠들썩하게 다 알고 이야기하는 영화나 소설은 별로 보고 싶지 않아 한다. 그러다가 가끔 시간이 지나서 문득 오래된 기억에 스쳐간 영화나 소설을 보고 싶을 때가 있다. 향수도 그랬다. 

영화는 구입해서 보는데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오래된 영화라 비싸지 않아서 좋았다. 그런데 유행의 시간이 무척 많이 흘렀는지 소설은 이미 절판되고 없었다. 중고 책도 상태가 잘 보전된 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책장이 누렇게 변색하고 겉표지가 거의 낡아서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으면 책장이 겉표지와 분리될 것 같은 상태의 낡은 중고 책을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다. 그리 두껍지도 않고 어렵지 않은 내용이었다. 그런데 단순한 내용이지만 뭔가 계속 책을 놓지 않고 읽게 하는 끌리는 소설이었다. 

그렇게 십몇 년 전에 유행했던 영화와 소설을 누구의 권유를 받은 것도 아니고 갑자기 생각나서 보고 읽었다. 어둡고 때가 낀 오래된 중세의 도시 거리들이 아른거렸다. 향수를 만들기 위해서 꽃을 넣고 우려내는 모습들이 내가 직접 본 것처럼 얼마 동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참이 지났다. 사람은 관심이 있으면 안 들리던 이야기도 들리고 안 보이던 글도 보이는 법이다. 영화 향수를 찍은 장소가 스페인의 헤로나란 것을 기사에서 읽었다. 그곳에 가고 싶어졌다. 


헤로나의 도시를 들어가는 입구에는 성당이 있다. 영화 향수에서 마지막에 많이 나왔던 광장이 이곳이다. 대단히 웅장하거나 정교한 무엇이 치장되어 있지는 않은 돌로 된 성당이 돌로 된 높은 계단 위에 있다. 계단과 성당을 담아 사진을 찍으려고 보니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카메라에 성당이 잡히지 않는다. 많이 뒤로 물러서서 찍거나 광각으로 찍어야 하는데 둘 다 하고 싶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니 보기보다 성당이 굉장히 위에 있고 계단은 무수히 많다. 계단을 올라 갈수록 숨이 차지만 아래쪽에 그늘을 벗어나 햇살이 내리쬐는 위쪽으로 가다 보니 땀도 많이 난다. 계단의 중간쯤에 살짝 넓은 공간이 나왔다. 잠시 숨도 돌릴 겸 서서 주위를 둘러본다. 성당 옆의 건물이 진한 오렌지빛과 황토색의 중간쯤 되는 노란색의 벽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옆 건물은 흐린 노란색의 벽을 하고 있다. 그 두 개의 건물이 성당과 기역자로 이어져 붙어 있어서 무채색의 성당과 계단의 돌들과 대조를 이룬다. 나는 빛으로 위쪽의 반쯤만 빛나는 두 개의 건물과 그 앞의 시커먼 길이 마음에 들었다. 길 앞에 한 남자가 개를 데리고 무심히 앉아 있다. 계단을 다 올라가자 왠지 성당은 나에게 성당이라기보다는 성벽 같은 느낌이 든다. 사람들은 기도를 하고 신을 만나기 위해 이 높은 계단을 올라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계단을 오르면서 모든 기도를 다 마쳤을 것 같은데 더 할 기도가 있었을까? 


나는 성당을 내려와 겹겹이 돌로 된 벽들로 둘러 쌓인 골목을 지나 도시로 들어간다. 골목은 계단으로 시작한다. 계단 자체가 높아서 앞이 보이지 않는 등산을 하는 느낌이다. 오래된 때가 많이 끼어있다. 언뜻 보기에 까맣다. 수천 년 동안 쌓인 먼지나 기름때가 돌에 스며들어 있는 것 같다. 발을 디딜 때마다 반질반질하게 마모된 길바닥은 돌의 딱딱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찌든 오물 냄새도 난다. 문득 세월의 흔적보다는 도시의 불결함을 느낀다. 골목은 사람이 두 명은 어깨를 맞대고 딱 지나갈 수 있는 너비다. 미로 같은 낡은 골목을 지나 큰 거리가 나온다.  넓은 길이 있고 양쪽으로 건물이 있다. 갑자기 가슴이 탁 트인다.  


한적한 거리 반대편에는 사람들이 몰려서 골목으로 들어가는 게 보인다. 길 건너 건물의 반대 편에는 강이 흐른다. 그 위로 놓인 다리를 가기 위해 사람들이 붐비는 것이다. 나도 그쪽으로 발길을 옮겨본다. 큰길 양쪽으로 건물의 그늘이 있어서 몰랐는데 다리에 나오니 하늘과 햇살이 찐하다. 어떤 필터로도 표현할 수 없는 하늘의 빛깔을 보고 있는데 저 멀리 내가 지나온 성당의 지붕이 보인다. 

강 위로 형형색색의 건물이 그대로 투영되어 건물과 물 위의 건물상이 완벽하게 대칭을 이룬다. 하늘과 강물을 포개서 꾹 접어서 찍어 낸 듯하다. 다리 한가운데 서서 강물에 비친 성당과 건물의 사진을 찍으니 사진은 너무나 맑은 하늘과 강물을 담고 있어서 기분이 좋다.   


다시 오래된 거리로 들어간다. 다리 위에서 사람들의 물결에 치이다 보니 이제는 돌계단과 벽들만 보여도 사람들이 붐비지 않으면 편하다. 어느 골목의 중간쯤 툭 튀어나온 집 앞 지붕 아래 두꺼운 원탁의 탁자가 놓여있다. 너무나 두꺼워서 절대 밀쳐지지 않고 수백 년은 그 자리에 놓여 있었을 것 같다. 탁자가 마치 오래된 나무 같다. 그 위로 햇살이 비춘다. 나는 잠시 그 앞에 서서 주변을 둘러본다. 그늘지고 까만 때까 낀 오래된 도시 위에 산뜻한 햇살과 하늘이 꿈틀댄다. 흑백 사진 위로 물감이 쏟아져 내릴 준비를 하는 걸 보고 있는 느낌이다. 문득 내 마음도 꿈틀 거린다. 이 도시에서 지금 영혼까지 살아있는 것은 하늘과 햇살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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