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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Aug 27. 2023

하늘을 날아 친구야

사라지는 등장인물

게임을 가장 즐겁게 즐기는 방법은 게임에 완전히 몰입하는 거다. 만약 몰입하지 못하면 게임은 지루해진다. 나에게 그것을 알려준 친구는 정작 자신은 게임에 몰입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게임은 아주 싱겁게 끝났다. 다시 시작하기 버튼도 눌러지지 않았다. 사실은 다시 시작하기 버튼이 애초에 없었다. 

한참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문득 끝나버리는 드라마나 소설을 마주칠 때가 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고 이건 뭔가 편집이 잘 못되었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정말 그게 끝이라고 하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사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감독이나 작가를 찾아가 다시 찍으라고 다시 쓰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들의 영화이고 그들의 소설이니까 말이다.


그림을 그리지 않은지 꽤 오래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그림이란 걸 거의 그리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서 표현이란 글과 말과 그리고 표정이나 행동이었다. 학교 다닐 때 미술시간에 그려야 하는 그림 말고 나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그림을 사용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연습장이나 화이트보드에 생각을 정리하다가 그림을 그리곤 한다. 그림을 그림으로서 머릿속의 생각이 정리된다. 재미있는 일이다. 그리고 나 같은 악필가에게는 메모와 함께 그림을 그려놓으면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나도 그렇고 남들도 내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어한다. 내 글씨는 글씨가 아니라 어딘가 다 풀어져서 굴러다니는 지렁이 느낌이 든다. 글자를 쓰는데 일관성도 없어서 기역인지 이응인지 나도 내가 써놓은 글을 읽기 힘들 때가 있다. 그럴 때 글 옆에 내가 그림을 그려놓은 게 있으면 글자를 다 읽어내지 못해도 나는 무슨 글을 쓰려고 했는지 그때 상황을 금방 유추해 낸다. 그러면 글자 그대로 다 알아내지 못해도 마음이 편하다. 내 글자는 못 알아봐도 내 그림은 내가 알아 볼만하다. 그림이 나 자신과 소통하는 방식이 되었다. 


게임의 법칙을 알려 준 친구가 나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편지는 작은 종이 두장이었다. 크기는 에이포 용지 반쯤이고 질감은 두툼하고 색은 연한 연두색이었다. 내용은 컴퓨터로 글자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두 번째 편지지의 마지막에 자기 이름하고 친구가 그린 그림이 있었다. 양 주먹을 오른쪽으로 쭉 뻗고 뒤에 망토가 휘날리며 날아가는 머리가 동그랗고 눈이 큰 슈퍼맨이다. 그림 옆에 "이게 나의 꿈"이라고 적혀 있었다. 

슈퍼맨은 내가 보고 직관적으로 느낀 거고 내 친구는 자신을 그린 것이다. 날아가는 지신이 자기의 꿈이 있었나 보다. 아무튼 잘 타이핑된 문자들 사이에 펜으로 그려진 그의 그림은 오랫동안 내 기억에 남았다. 그건 그 친구와의 마지막 소통이었고 그림이 주는 여러 가지 상상 때문에 그랬다. 나는 그의 그림을 여러 번 보았다. 이제 내 기억엔 그의 얼굴이 희미해졌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생생하다. 아마도 그 후부터 나도 그림으로 내 생각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 같다. 


나는 친구의 어이없는 결말을 생각하면서 며칠을 우울하게 보냈다. 나는 나의 친구에 대해서도 그리고 나에 대해서도 도무지 분명히 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게 불확실하다는 게 확실해지던 시간이었다. 갑자기 한국 식품점에 갔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아마도 드라이브를 하다가 간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 한국 음식이 먹고 싶어서 갔을지도 모른다. 날은 춥고 습했다. 해는 떠 있지만 구름에 가려서 흐렸다. 낮이지만 밤같이 침침하고 어두웠다. 시험은 다가오고 있었고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한국 식품점이 있는 동네는 생활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가 아니었다. 몰의 주차장은 쓰레기가 바람에 날아다녔다. 주차장에 있는 차들도 어디 한 군데씩 찌그러져 있는 차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풍경은 마치 그때의 내 마음같이 공허하고 황폐했다. 

나는 어둡고 불완전한 분위기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한국 식품점에 들어갔다. 특별히 살게 있는 것도 아니라 이것저것 그냥 보이는 데로 몇 개 샀다. 그리고 계산을 하고 나오던 참이었다. 주인아줌마가 나를 불렀다. 표정이 왜 그러냐고 힘내라고 하면서 계산 카운터 앞에 놓인 백설기 한팩을 내 손에 쥐어 주었다. 나는 뭐라고 길게 이야기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저 고맙다고 말하고 떡을 손에 쥐고 나왔다. 날씨가 참 어둡고 쌀쌀했다. 손에 쥔 백설기는 미지근하고 말랑했다. 차갑지 않았다.


떡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떡은 백설기다. 찹쌀이 아니라 맵쌀로 만든 부서지는 백설기 말고는 떡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어릴 때 생일날 먹던 무지개떡의 영향인지 모르겠다. 근데 그날 집으로 돌아와서 먹은 백설기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기억에 남는 백설기였다. 눈물이 찔끔 날 만큼 맛있었다. 이제는 아쉽게도 그 백설기를 준 아줌마의 행방도 모른다. 돌아보니 고마웠던 마음을 전하지도 못했다. 시간은 참 빨리도 앞으로만 흐른다. 


누군가의 표정을 보고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은 어른이다. 나는 어른인가 아니면 아직도 슈퍼맨을 꿈꾸는 아이인가? 친구야 너는 하늘을 날아 어디쯤 가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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