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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Aug 11. 2024

장마처럼 비가 내리더라

도시 스케치_방콕

고요한 창 문 너머로 편의점 배달 트럭의 사이드 브레이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거추장스러운 나무 블라인드를 황급히 들추고 창밖, 정확히 말해서 창밖의 길 위를 내려다본다. 콘크리트 찻 길은 더 검어졌다. 눈을 더 크게 뜨고 본다. 검은 콘크리트가 반짝거리고 그 위에 빗물이 찰랑거리며 있다.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창문을 연다. 창문이 닫혀있을 때와는 다른 생생한 소리와 공기가 내게 다가온다. 


"오늘은 장마처럼 비가 내리더라." 아직은 봄에 가까운 4월 어느 비가 많이 내렸던 날, 친구가 내게 말했다. 그때 나는 장마가 언제쯤 오는 건지도 모르고 살았다. 비가 오던 눈이 오던, 계절은 내 삶의 방향을 보게 하는 기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게 오면 오는가 보다 그렇게 느낄 뿐이었다. 하지만 그날 친구가 말하는 장마라는 단어가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날이후 나는 일기예보를 유심히 듣고 장마가 언제쯤 오는지 알게 되었다. 그건 정해진건 아니지만 초여름에 오는 거였다. 


그때도 어느 봄이었다. 나는 방콕에 출장을 갔다. 호텔의 에어컨은 너무 강해서 잠을 깊이 잘 수가 없었다. 회사 사무실도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나는 왜 직원들이 가을 옷처럼 카디건이나 스웨터를 입고 사무실을 돌아다니는지 이해가 갔다. 하지만 사무실과 호텔 밖은 조금만 걸어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덥고 땀이 났다. 가끔 상점의 활짝 열어둔 문으로 나오는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기막히게 좋았다. 강력하게 에어컨을 틀고 문을 활짝 열어놓는 것은 더위에 지친 행인들에게 오아시스 같은 역할을 하는 거였다. 전기 낭비가 아니었다. 


출장 업무가 끝나고 시간이 딱 하루가 비었다. 주말이었다. 밤 비행기는 이럴 때 사람을 쓸쓸하게 만든다. 나는 거대하고 화려한 도시에서 별 다른 할 일이 없었다. 사실은 뭔가를 찾아서 할 의욕이 없었다. 보통의 나라면 호텔에 짐을 맡기고 나와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시간을 아쉬워하며 마지못해 공항으로 갔을 것이다.   


방콕에 사는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친구는 주말이라 약속이 있었다. 나는 친구가 나간 집에서 비행기 시간까지 기다리다가 공항에 가기로 했다. 우중충한 날씨는 오후가 되자 비가 살짝 내렸다. 친구의 집은 시내 한가운데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경비원이 반겼다. 그리고 빗물을 머금은 텅 빈 수영장이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도 마주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요한 콘도였다. 


집안은 넓고 깨끗했다. 거실 한가운데 여러 개의 액자가 놓여있고 거기에 사진이 있었다. 천천히 사진을 구경했다. 친구의 어릴 적 사진도 부모님 사진도 보였다. 이미 오래전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형제도 없던 친구였다. 나는 새삼 그가 어떻게 지구 위에서 혼자 살아가는지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저녁 약속이 있는 친구가 나가자 그의 유일한 가족인 강아지가 나를 경계의 눈으로 쳐다봤다. 폐가 아파서 수술을 해서 숨소리가 커다란 강아지였다. 밖에서는 빗소리가 들렸다. 낯선 집에서 헉헉거리는 강아지와 서로 경계하며 쳐다봤다. 하지만 곧 지쳐서 나도 강아지도 소리 없이 잠들었다.  


그날밤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도 비가 내렸다. 좀처럼 무서움을 모르는 나도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쏟아지는 비 때문에 두려웠다. 비는 정말 세차게 쉬지 않고 가는 내내 내렸다. 뭔가 미덥지 않은 비쩍 마른 기사아저씨가 제대로 운전을 할까 싶어서 눈을 감았으나 잠들지 못했다. 공항이 다가오는지 톨게이트에서 잠시 택시가 멈췄다. 톨비를 달라는 건지 나를 쳐다보면서 뭐라고 하길래 톨비를 하라고 돈을 줬다. 톨비를 계산하고 다시 빗속을 달렸다. 멀리 공항의 불빛이 보였다. 드디어 나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때 빗속을 달리던 택시에서의 시간만큼 불안하고 외롭고 쓸쓸했던 기억은 다시없었다. 모든 여행과 출장에서 그때가 나에게는 그랬다. 비 때문이었을까?  택시에서 내려서 현금으로 택시비를 내는데 높은 습도 때문인지 돈이 축축했다. 


내 기분과는 다르게 공항은 밝고 시원했다. 나는 빛으로 들어와서 안도했다. 하지만 여전히 울고 싶었다. 이유는 없었다. "오늘은 장마처럼 비가 내리더라. 그런데 나는 이유 없이 장마처럼 울고 싶더라." 내가 그때 친구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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