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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Aug 28. 2023

니체의 산책

도시 스케치_제노바

밀라노를 출발한 버스는 오랫동안 산 길을 달렸다. 나는 졸다가 깨다가를 반복했다. 가끔 보이는 산속의 마을들이 이쁘기는 했다. 그래도 비슷한 풍경을 계속 보니 점점 지루해졌다. 눈을 감고 얼마나 잤는지 드디어 버스가 멈췄다. 나는 잠에서 깨어 창 밖을 내다봤다. 파스텔 색의 벽들이 죽 이어져 있는 건물이 보인다. 나는 그 화려하고 신기한 색에 깜짝 놀라서 눈을 깜박이고 다시 쳐다본다. 파스텔색이 맞다. 노란색 분홍색 주황색 그리고 그 위에 부드럽고 하얀 설탕가루를 살짝 뿌렸는지 은은하게 뿌옇다. 

건물들이 어릴 때 많이 먹던 케이크 위에 있는 버터로 만든 장식 같다. 모던하거나 세련되지는 않지만 눈에 띄는 색과 아기자기함 때문에 한번 만져보고 싶다. 고개를 바싹 창에 붙이고 거리를 쳐다본다. 파스텔 색들의 벽으로 이루어진 건물들과 그 옆으로 돌로 만들어진 인도가 보인다. 돌바닥은 세월의 때가 깊이 끼어 까맣다. 동화 같은 골목 풍경 때문에 이렇게 차가 막혀서 버스가 가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는 것이 행운으로 여겨진다.


드디어 버스가 항구 쪽의 큰길로 나왔다. 왼쪽으로는 바다와 배들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도시와 산이 보인다. 도시와 바다의 중간에 솟은 고가도로 위를 달려서 그런지 버스를 타고 있지만 관람 열차를 타고 있는 기분이다. 산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들은 골목에서 처음 봤던 건물보다 파스텔 색들이 조금 덜하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도시의 건물들은 노랗고 하얗고 파랗다. 멀리 있는 건물들은 언덕이나 산처럼 보인다. 마치 산에 건물을 꽂아 놓은 것 같다. 가까운 거리를 내려다보면 파스텔 색조의 건물들 사이사이로 어지럽고 조잡한 간판들과 전깃줄이 뒤엉킨 전봇대도 보인다. 콘크리트 길 위로 차들도 사람도 붐빈다. 하지만 모든 게 지중해를 바라보고 그린 인상파 화가의 그림 같다. 그림자 속에서도 빛이 도드라지는 도시다.  


나는 대리석으로 번쩍 거리는 넓은 로비가 있는 신도심의 기차역 부근에 현대적인 고층 호텔에서 잠을 잤다. 외관이 항금 빛으로 번쩍이는 높은 건물이지만 로비는 적절하게 올드하고 현대적이었다. 방은 짙은 나무색의 가구가 있어서 분위기가 따뜻하고 안정적이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커튼을 치자 해가 막 뜨려고 했다. 나는 호텔 밖으로 나가서 거리를 두리번거렸다. 커다란 길이 쭉 뻗은 쪽과 그 반대편은 로터리가 있고 건물들과 낮은 산이 보였다. 나는 로터리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신도심이라고 하지만 고층 건물들이 많이 없었다. 낮고 고풍스러운 건물들 뒤로 산과 붉은 하늘이 펼쳐져 있다. 저쪽이 동쪽인가 보다 하고 하늘을 보고 있는데 자전거를 타고 사람이 지나간다. 커다란 버스도 지나간다. 새벽이라 지나는 사람은 그게 다이고 나는 붉은 태양이 하늘에 번지며 금빛으로 점점 퍼지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이월초의 아침인데도 춥지가 않다. 가을 아침쯤 되는 기온이다. 하늘은 금세 환해졌다. 하늘이 환해지고 나니 거리의 풍경은 어제 보았던 도심보다는 멋이 없다. 파스텔의 색이 빠져서 그렇다. 


호텔로 들어오니 검정 양복을 입은 키가 아주 큰 할아버지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인사를 한다. 본조르노. 다소 길게 말하는 발음이 나쁘지 않다. 나도 인사를 한다. 밀라노보다 이곳은 왠지 시골스럽고 정감이 간다. 아침을 먹으러 식당에 가니 커피 향기는 나지 않는다. 그러나 창가로 들어오는 밝은 빛 때문인지 상쾌하다.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식당인데도 내 기분은 즐겁다. 느리게 아침을 먹으면서 거리를 내다본다. 햇살이 참 따스하다. 겨울이지만 거리를 돌아다니고 산책을 해도 충분히 따스하겠다. 문득 니체가 생각났다. 그가 이 도시의 어딘가를 산책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따라가 보고 싶다. 페스트를 불러들인 이 항구 도시의 어디를 돌아다니면 그를 만날까 상상했다. 자꾸만 어제 버스에서 지나치며 보았던 파스텔 색의 건물과 골목이 생각났다. 이곳은 니체의 도시다. 겨울이지만 뜨거운 태양이 있고 죽음을 불러들인 오래된 항구지만 밝은 파스텔색의 건물이 즐거움을 일으킨다. 무엇도 미리 예상할 수 없다. 그저 존재하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면 되는 실존의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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