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슬픈 도시 4_떠냐야 만 하는 자
그 도시의 동쪽에서 부는 바람은 호수 위를 지나와서 무척 차가웠다. 그 바람은 사람을 그냥 스쳐가지 않았다. 차가운 공기가 나도 모르는 사이 온몸의 세포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파부가 얼얼하지만 나중에는 느낌이 없고 몸이 붕 떠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래서 호수에 있다가 집에 오면 한참을 서늘함에 떨어야 했다. 여름에도 예외는 아니다. 뜨거운 햇살도 차가운 호수의 표면을 덥히지는 못했다. 호수 옆에 가면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느껴지는 그런 서늘함이 느껴졌다. 단지 여름에는 다른 계절처럼 바람이 많이 불지 않을 뿐이었다.
오래전 어느 날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무렵이었다. 나는 동쪽에서 부는 바람을 맞으며 호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여기서 끝나면 참 아까운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별 다른 방법은 없었다. 며칠 동안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계속 갈망하는 마음이 나를 슬프게 했다. 그러나 그 마음을 비우고 세상에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하지만 떠나기 싫은데 떠나야 하는 마음은 무겁고 또 무거웠다. 마음에 돌덩어리가 자리 잡았다는 흔한 표현을 쓰기 싫지만 정말 내 마음이 그랬다.
떠나야 할 것을 생각하면 웃어도 가슴 한편이 묵직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새로운 시작이었다. 끝나고 시작하고 끝나고 시작하고 모든 게 그랬다. 나는 언제나 그 중간쯤 에서 계속 두리번거리면서 아쉬워하고 슬퍼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 그게 인간 삶의 패턴이란 걸 알고 조금은 무뎌졌다.
처음 그 도시에 간 날도 바람이 불고 태양은 구름에 가려져서 흐린 날이었다. 하지만 그때 내 마음은 한없이 가볍고 맑았다. 나에게는 커다란 꿈이 있었다. 그리고 막 그 꿈을 향해서 첫발을 내딛던 시간이었다. 무슨 일이든 나에게는 새로운 것이었다. 어색하고 서툴렀지만 그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나는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 모험을 시작하는 기분이 들곤 했다.
생각해 보면 그 첫 해 겨울은 참 길었다. 나뭇가지는 항상 텅 비어있었다. 밤에는 어둠과 함께 바람이 거리를 지배했다. 해 질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신호등이라도 걸리면 내 앞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그렇게 차가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고 곧 올 것 같으면서도 봄은 쉽게 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몇 해를 보내고 나서야 오지 않을 것 같던 봄이 오는 법을 알았다.
4월의 세찬 눈보라를 맞고 봄에 대한 희망을 모두 버리고 나면 봄이 왔다. 그것도 며칠 밤 새에 순식간에 왔다. 매일 나무에는 초록의 잎들이 무성해져 갔고 하늘은 푸르고 태양이 뜨거웠다. 그리고 급하게 왔던 봄이 급하게 가고 긴 여름이 왔다. 그때 거기 나의 기다리던 봄은 곧 여름이 되었다. 나는 오월이 얼마나 짧고 찬란한 계절인이지 그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마음에 새겼다.
여름엔 나무마다 초록 잎이 빽빽하게 돋아나 바람이 불면 반짝거리면서 "쉬익" 소리를 냈다. 방에서 들으면 "찰찰 찰찰"로 들리기도 했다. 그렇게 나무가 바람을 따라 노래를 부르던 어느 여름날 나는 차를 타고 언덕을 오르면서 우연히 백미러를 보았다. 거울 안에 호수는 태양을 반사하고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렇다.
우리는 그때 눈이 딱 마주쳤다. 자연은 거칠었지만 나의 영혼을 쓰다듬어주기에 충분히 아름다웠다. 나는 그 후 인간이 조금 되었다. 자연에 대한 내 눈이 떠졌다. 자연은 그런 것이고 나는 또 그런 것이구나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알아보고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어젯밤에 신호를 기다리면서 본 가로수는 아름다운 가을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길 건너편의 거대한 빌딩의 광고판이 번쩍 거렸다. 아스팔트 위로 자동차가 지나갔다. 나무는 거기서 긴 침묵의 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시 어둡고 차가운 밤들이 지배하는 인내의 시간이 올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