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S Nov 18. 2023

모험을 멈춘 자

도시 스케치_부르고스

바람이 몹시 차가웠다. 오래된 성당을 마주하고 성벽에 둘러 쌓인 광장의 돌 벤치에 앉아 있었다. 거리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북적이지도 한가하지도 않았다. 나는 수천 길로를 날아서 성당을 보러 온 것도 아니고 쇼핑을 하러 온 것도 아니었다. 내 여행은 항상 작은 모험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험이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강아지와 산책하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차가운 바람이 부는 광장의 불빛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눈은 조용히 내렸다. 촘촘히 내려오는 눈송이 때문에 검은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하늘과 땅이 눈송이들로 이어진 듯 그렇게 끝없이 눈송이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어느덧 사람들은 다 사라지고 길 위에는 수북이 쌓여가는 눈과 그 위를 비추는 가로등 불빛만이 있었다. 너무나 고요하고 사랑스러운 풍경이었다. 길 위에 쌓인 눈은 백설기나 마시멜로같이 달콤하고 따스해 보였다. 


우리는 그 조용한 밤에 눈길을 뚫고 호수를 한 바퀴 도는 자동차 여행을 시작했다. 자동차는 두대였고 일행은 여섯 명이었다. 아무도 여행의 거리를 계산하지 않았다. 눈이 안 와도 호수를 한 바퀴 돌려면 꼬박 열다섯 시간은 운전해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호수를 한 바퀴 도는 그 생각에 동의했다. 눈은 장애물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여행을 기억하게 해 줄 낭만적인 배경이라고 생각했다. 


고속도로에서도 눈은 끝없이 내렸다. 와이퍼는 바쁘게 쉬지 않고 창문에 떨어지는 눈을 치우며 움직였다. 사방이 눈송이들로 둘러 쌓여 눈의 나라 한가운데를 달리는 밤은 환상적이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이제 차 안에서 보이는 모든 풍경들이 너무 익숙해서 지루해질 때쯤 와이퍼가 움직일 때마다 소리를 냈다. 밤이 깊어지고 기온은 더 떨어지고 있었다. 


눈을 치우던 와이퍼의 물기가 조금씩 얼기 시작했고 옆으로 밀어내도 끝없이 떨어지는 눈 때문에 창 옆으로도 얼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덜거덕 거리면서 와이퍼가 움직였고 눈과 얼음으로 우리의 시야는 좁아졌다. 그때쯤에서 우리는 앞으로 가야 할 거리를 생각하고 어둠과 추위를 피할 중간 목적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날씨를 대변하듯이 아니면 시간을 대변하듯이 고속도로 위에는 커다란 트럭 이외에 우리 같은 승용차는 한대도 보이지 않았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송이가 밀려왔다. 게다가 날씨는 추워서 앞 유리창의 가장자리에 밀려난 눈이 단단히 얼기 시작했다. 


고속도로 주유소에 가서 얼음을 없애고 주유를 했다.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말하지 않았다. 먼저 돌아가자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두대의 차 중 어느 차도 멈추지 않고 눈을 헤치고 계속 달렸다. 새벽이 되어도 눈은 그치지 않았고 호수가 주변을 달리는 길은 이제 국도로 바뀌었다. 더 어두웠고 더 미끄러웠다. 우리는 점점 속력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이름 모를 작은 마을에서 하루 쉬어가기로 했다. 그날 새벽 눈의 나라를 통과해서 달려온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모두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다행히도 눈은 그치고 하늘은 맑았다. 햇살 때문에 어제 내린 눈은 표면이 반짝 거리며 녹고 있었다. 온통 하얀 눈으로 덮인 마을과 길밖에 보이지 않았다. 호수의 표면도 모두 눈으로 덮여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마냥 즐거웠다. 가다가 쉬다가를 반복하면서 사진을 찍고 눈 위를 뛰어다녔다. 그러다 아주 한적한 동네 편의점에 들렀다. 


나는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내리쬐던 편의점의 낡은 유리문을 밀고 나가려다가 입구에 진열되어 있던 엽서를 보았다. 한 인디언이 천막집 앞에 서 있는 흑백 엽서였다. 가죽과 나무로 지은 세모난 집과 그 옆에 서 있는 인디언의 찡그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인디언의 무표정한 얼굴과 눈빛이 이상하게 끌렸다. 뭔가 모험가의 정신을 놓지 않겠다는 고집스러운 표정 같아서 내 여행의 동지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엽서를 샀다. 한동안 그 엽서는 부적처럼 내 책상 위에 있었다. 이사를 갈 때도 항상 가지고 다녔다.


언제 잃어버렸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이제 그 엽서는 내게 없다. 어딘가를 가려면 이제는 항상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네비를 통해 길을 안내받는다. 목적지 하나가 끝나면 두 번째 세 번째 목적지를 찾는다. 아무 계획도 없이 지도를 한번 쓱 보고 눈길을 달려서 여행을 떠나던 때는 영화 속 장면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이제 나는 도시의 편리함과 풍요로움에 잘 길들여져 있다. 


잃어버린 엽서처럼 내 모험정신이나 용기는 어딘가로 나도 모르게 조금씩 사라졌다. 한적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찾아 멀리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와도 8차선 대로에 가득 찬 자동차의 불빛이 보이는 도시에 접어들면 그제야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도시는 아름답고 또 슬프다. 

작가의 이전글 시작과 끝의 그 어디쯤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