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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Aug 26. 2023

기억의 강으로

도시 스케치_방비엥

언제 무너져도 이상 할 것이 없어 보이는 나무로 만든 다리 위를 지나간다. 나무 위에 깐 나무판자가 들썩이며 소리를 낸다. 다리 밑에 강물은 그리 깊어 보이지 않고 물살도 세 보이지 않아서 큰 두려움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 낡은 나무다리 위를 차가 지나갈 때 풀썩이던 나무판자 소리와 먼지는 신경이 쓰인다. 나는 지금 어느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문득 꿈을 꾸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내가 나무다리를 본 것은 아주 아주 어릴 적 왕십리에 있는 시장을 지나 검은색 나무다리를 건너 외할머니 댁에 가던 중에 보았다. 그 나무다리도 나의 기억에는 꿈처럼 아득히 먼 하나의 장면으로 남아있다. 가끔 이모들에게 확인하지 않으면 내가 본 나무다리가 사실이 아닐지도 모를 만큼 느껴질 정도로 까마득히 먼 기억 속에 있다. 하지만 여기서 지금 나는 나무다리를 분명히 건너고 있다.

나무다리를 건너서 간 곳은 마당이 있는 식당이다. 나무로 만든 집의 뒤로는 내가 건너온 그 개울 같은 작은 강이 있다. 그리고 앞마당에 나무로 만든 식탁과 의자가 있다. 멀지 않은 곳에 잡초들이 무성하고 닭들이 돌아다닌다. 저녁이라 태양은 누그러져가고 있는데 날파리와 모기들은 여전히 많다. 나는 그 나무 식탁에 앉아서 닭고기 요리를 먹었다. 닭은 아주 크고 신선하고 맛있었다. 아마도 저기 저 풀 위를 돌아다니는 닭들 중 한 마리였을지도 모른다. 

저녁 식사를 마치자 갑자기 사방이 다 어두워졌다. 이렇게 캄캄한 곳에 있기는 참 오랜만이다. 어쩌면 생전 처음 일지도 모른다. 내게 밤이 정말 가깝게 다가와 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이 정말 많다. 도시에서 모두 사라진 별들이 여기에 나와 있다. 내가 건너왔던 그 낡은 나무다리를 지나 다시 숙소로 간다. 

어둠 속에서 덜컹 거리는 나무다리의 소리와 그 밑을 흐르는 물소리가 올 때보다 더 크게 들린다. 흙길을 따라 불빛이 보이는 숙소 부근으로 오니 전등불들을 밝히며 야시장이 열려있다. 나는 과일을 쌓아 놓고 파는 과일 가게로 가서 망고를 샀다. 아주머니는 빠른 손으로 순식간에 망고 껍질을 다 벗겨준다. 한 뭉치가 2달러면 족하다. 망고 냄새가 달큼하다. 나는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고 숙소로 걸어간다. 전등 불빛 밑에서 옷을 파는 사람들과 풀빵을 파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앞을 기웃거리며 지나는 여행자들로 잠시 북적인다. 그러나 거기만 벗어나면 어둠이 짙다. 

왠지 어두운 공간을 지나면 시간을 뛰어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 같다. 할머니는 마루에서 넓적한 대접에 얼음을 넣고 시원한 미숫가루를 타 주신다. 그리고 내 옆에 앉아 부채질을 해주시며 내가 먹는 걸 봐줄 것 같다. 하지만 어두운 길을 지나 돌아온 호텔방에서 나를 기다린 것은 초록색의 아주 작은 도마뱀이었다. 나는 베란다 문을 열어서 개구리인지 두꺼비인지 이름 모를 곤충들의 소리가 끝없이 들리는 어둠 속으로 작은 도마뱀 친구를 내보냈다. 

아침에 일어나 호텔 밖으로 나오니 커다란 강물이 조용히 흐르고 그 뒤로 펼쳐진 나지막한 산들이 겹겹이 둘러져있는 모습이 그림 같다. 아침을 짓기 위해서 장작을 때는 것인지 나무 탄 냄새가 사방에 퍼져있다. 강물의 물살을 가르면서 노를 저어 긴 배가 지나간다. 철퍼덕 거리는 노 젓는 소리와 까맣게 탄 어부의 모습은 단순하고 소박한 풍경에 어울린다. 공기도 풍경도 소리도 모두 도시인간인 나에게 다가와 조용히 가슴을 두드리는 순간이다. 

서늘한 바람이 잔잔히 분다. 여름에 할머니 집에 놀러 가면 할머니는 내가 잠이 들 때까지 옆에 앉아서 부채질을 해주셨다. 그리고 가끔씩 내 얼굴과 다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내가 혹시 더울까 땀 흘리지 않을까 손으로 확인해 보시는 거였다. 할머니의 손바닥은 부드럽지 않고 거친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를 재우기에 충분한 사랑이 담긴 손길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강의 바람을 맞으며 갑자기 그 손길을 떠올렸다. 

이곳은 흘려보낸 기억을 거슬러 오르게 해주는 마법 같은 강의 도시다. 어제도 오늘도 나는 잊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여기는 현재를 살지만 과거를 추억하게 해주는 강물이 흐른다.  좋은 기억은 영원히 붙잡고 싶지만 붙잡으면 강물처럼 손아귀에서 빠져나간다. 그러나 가끔 한 번쯤은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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