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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Sep 02. 2023

운이 좋아서 살았다

도시 스케치_런던 1

나는 런던에 가기 전까지 신대륙을 좋아했다. 풍부한 자원과 큼직한 땅덩어리가 주는 안락함을 좋아했다. 그리고 익숙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 때문에 런던에 가게 되었다. 출장이라기에는 조금 긴 기간이었다.

 

구대륙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런던에서 뭔가를 보고 느낀다는 것을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 도시의 장점은 영어를 쓰는 것 하나 정도로 느껴졌다. 출장을 떠나기 전 나는 몹시 심함 목감기에 걸렸다. 기침이 심해서 자다가 깰 정도였다. 그러나 출장 전까지 국내에 다른 출장까지 겹쳐서 쉴 시간도 감기가 호전될 시간도 없었다. 더구나 어머니가 아프셔서 입원을 하고 계셨다. 그때 출장 전 매일의 삶이 우울하고 불안정했다. 


1월의 어느 일요일 저녁 런던에 도착했다. 큼직하지는 않지만 작지도 않고 탄탄하게 보이는 히드로 공항에서 튜브를 타고 시내로 나왔다. 요금이 비싼 것을 빼면 우주선 같은 지하철을 튜브라 부르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길게 뻗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날씨는 밤인데도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더구나 사람들도 활기차게 걸어 다니고 도시는 밝았다. 안개가 끼고 어두운 거리와 무표정한 사람들을 상상했는데 그것은 올리버 트위스트 같은 영화를 보고 만들어진 나의 상상일 뿐이었다. 오래된 건물들 안쪽에 자리 잡은 호텔로 들어가서 체크인을 했다. 겉모습과는 완전히 다르게 현대적인 디자인의 호텔 내부에 또 한 번 감탄했다. 더구나 밤공기가 포근해서 그런지 기침이 나지 않았다. 런던의 모든 것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일을 하러 가기 위해서 아침 일찍 호텔에 나섰다. 호텔에서 사무실까지는 튜브로 두 정거장이지만 걸어서 이십 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다. 나는 한 시간이나 여유가 있어서 천천히 걸었다. 역시 날씨는 춥지 않았다. 그리고 하늘은 너무나 맑았다. 비 내리는 런던이 아니라 햇살 쨍쨍한 런던이었다. 캘리포니아의 겨울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도시의 냄새와 바람을 측정할 수 있는 기계가 있다면 바람과 공기가 샌프란시스코의 다운타운과 몹시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세인트 캐써린 성당 앞에 화사가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성당은 워낙 유명한 곳이라 쉽게 찾아갔다. 하지만 건물에 주소가 보이지 않아서 건물을 앞에 두고 두리번거려야 했다. 나는 낯선 곳에서 나름 길을 잘 찾는 편이지만 그때는 내 눈에 빌딩의 주소가 보이지 않았다. 미국이라면 얼마나 쉽게 찾을 수 있을까 속으로 투덜거렸다. 한참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성당 앞의 건물을 다 둘러보고 있었다. 내가 찾는 주소는 분명 성당 앞인데 거기에는 주소가 없고 더 내려가면 주소가 완전히 틀렸다. 


어느덧 시간은 정각 아홉 시가 되어가고 나는 초초해졌다. 혹시나 내가 잘 못 이해한 건가 해서 건너편 길의 건물들을 둘러보려고 길을 건너려던 찰나였다. 길을 건너려고 왼쪽을 살펴서 아무것도 안 오길래 발을 내딛으려다 오른쪽에서 달려오는 자전거를 못 보고 건널뻔했다. 그때의 긴박감과 놀람은 나만이 느낀 게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오던 사람도 느꼈다. 자전거 타고 오던 사람은 놀라서 벨을 울리며 나에게 욕을 했다. 나는 아주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아침부터 시내 한복판에 그렇게 빨리 달리는 자전거가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길을 건너면 나는 왼쪽만을 돌아보게 된다는 거였다. 그게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 짧은 순간의 해프닝 뒤에 나는 거기서 길을 건널 의욕을 잃었다. 길 건널 줄도 몰라서 사람들 많은 길 한가운데서 욕을 먹고 나니 낯선 곳에 있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다시 뒤에 있는 건물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찾던 건물이 바로 처음부터 내가 보았던 유리로 된 하얀 건물임을 알게 되었다. 너무나 모던하게 유리로 지어진 거대한 하얀 빌딩은 그 주소를 건물의 로비 쪽으로 좀 들어가서 옆쪽에 붙여 놓았다. 빌딩 앞쪽만 눈여겨보고 지나가는 내 눈에 안 보였던 것이다. 나는 그날 첫 번째 출장 미팅에서 삼십 분 정도 지각을 했다. 워낙 당당하게 들어가서 내가 지각을 했다고 눈치 주는 사람도 없었다. 자리에 앉아서 생각해 보니 삼십 분만 늦은 게 행운이었다.


만약 길을 건너다 자전거에 치였더라면 그나마 참석도 못했을 텐데 운이 아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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