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물이다

입맛의 성장_물

by YS

1. 물은 보리차다

점심시간에 커다란 노란 주전자에 끓는 보리차를 담아 와서 교실 뒷자리에 두었다. 그러면 우리는 플라스틱 컵에 그 물을 따라 마셨다. 물을 다 마셔서 빈 주전자는 어쩔 땐 체육시간에 피구장을 만들 때도 쓰였다. 거기에 운동장에 있는 수돗가 물을 받아서 흙으로 된 운동장 바닥에 줄을 그어서 피구장을 그렸다. 그건 주로 선생님이 했다. 힘없는 아이들은 그 무거운 주전자를 들고 걸어가면서 선을 똑바로 그을 수 없었다. 노란 주전자는 찌그러지기는 해도 여러모로 쓸모 있는 물건이었다. 집에서도 커다란 노란 주전자에 보리차를 넣어서 끓여 먹었다. 보리차는 특히 한 여름에 학교 다녀와서 냉장고에 있던 것을 꺼내 따라 마실 때가 가장 맛이 좋았다.


2. 물은 음료수이다

중고등학교 때는 교실에서 물을 마신 기억이 없다. 그럼 하루 종일 물을 안 마시고 어떻게 살았는지 나조차도 궁금하다. 아마도 매점이나 식당에 가서 물통에 들어있는 물을 따라 마시거나 복도에 있는 자판기에 있는 음료수를 사 먹었던 것 같다. 보리차가 있는 주전자에 물을 받아서 교실에서 먹었던 기억은 없다.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마시거나 매점에 가서 음료수를 사 먹었던 기억만 있다. 음료수가 물보다 좋을 때였다.


3. 물은 워터파운틴이다

대학에 가니 워터파운틴이라고 건물 곳곳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나가다가 목이 마르면 말이 물을 마시듯이 고개를 대고 입을 벌려서 버튼을 눌러 졸졸 솟아 나오는 물을 마시면 되는 거였다. 그게 건물 곳곳에 있었는데 자주 마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시긴 했다. 버튼을 누르면 정수기가 돌아가는지 뭔가 기계작동 소리가 들리면서 물이 나왔는데 입을 먼저 대기보다는 물이 나오는 걸 보고 입을 대고 마시는 게 물을 얼굴에 안 묻히고 마시는 방법이었다. 아마 영화를 보다가 알게 된 것 같다. 베버리힐즈의 학교에서는 거기서 에비앙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었다.


4. 물은 에비앙이다

물을 사 먹는다는 개념에 점점 익숙해졌다. 물의 종류도 다양했다. 그중에 가장 세련된 물이 프랑스산 에비앙이었다. 그러나 물맛은 그냥 그랬다. 미네랄이 들어 있어서인지 깔끔한 맛은 아니었다. 생물학과 복도를 지나다 보니 시중에 파는 다양한 물을 사다가 한 실험을 봤는데 물을 증발시켰을 때 불순물이 가장 많이 나오는 물 중에 하나가 에비앙이었다. 원래도 잘 안 사 먹었지만 에비앙은 내 물이 아니었다. 코카콜라에서 만든 아쿠아피나를 즐겨마셨다. 광고가 재밌고 괜찮았다.

5. 물은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어느 날 동유럽 여행을 하다가 유명한 호숫가에서 한국인 부부를 만났다. 은퇴하신 부부가 꼭 붙어서 다니는 게 보기 좋았다. 내게 사진을 좀 찍어 달라고 하셨다. 그러더니 굳이 내 사진도 찍어주겠다고 하셨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시라고 하고 사진을 찍은 뒤에 잠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짐가방 하나를 생수를 가져왔다고 했다. 물 사 먹는 돈이 가장 아깝다고 하셨다. 하긴 맥주나 와인값에 비하면 물값이 싼 게 아니었다. 여러 가지 여행 팀을 공유했다. 헤어질 때 나에게 배낭에서 한국 생수 한통을 주셨다. 나도 이제는 유럽여행 갈 때는 부치는 짐가방에 생수 몇 병을 넣어간다.

6. 물은 아구아프리아다

스페인어를 취미 생활로 배우면서 스페인에 가면 스페인어를 맘껏 써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스페인에 가니 스페인어가 내 맘대로 되지 않았다. 스페인어로 뭔가를 질문하면 문제는 너무 빨리 답하는데 단어만 알아듣기도 급급해서 스페인어를 하는 게 손해였다. 영어로 묻고 영어로 답을 듣는 게 안전했다. 그러나 당당히 어디를 가던지 내가 메뉴를 고르고 주문하면서 하는 말은 아구아프리아였다. 스페인 물맛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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