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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Oct 02. 2023

아무것도 아닌 안개

 익숙한 나라의 낯선 도시_구례

나는 운전을 하고 있었지만 마치 방안에 들어와서 문을 닫고 있는 듯 사방이 조용했다. 길가에 차들도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사람은 더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맞는지 싶을 정도로 고요한 길 위에 숙소가 있었다. 사방은 논과 밭 그리고 좀 더 멀리에는 산으로 덮여 있다. 콘크리트의 길 말고는 거의 모든 게 푸르다. 

숙소도 조용했다. 입구에 들어서자 프런트 여자의 전화 목소리만 들렸다. 내가 체크인을 요청하자 여자는 나를 슬쩍 아래위로 쳐다보았다. 나는 여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처음에 숙박비가 결재 됐나요라고 한마디 혼잣말처럼 묻는다. 내가 그 말에 아무 반응이 없자 조용히 키를 내주었다. 숙박비를 결재 안 하면 예약이 안되고 예약확인코드도 받을 수가 없다. 예약 확인 코드를 건네줬는데 그런 걸 묻는 논리적 근거가 없다. 나는 그 여자가 앞으로는 쓸데없는 말을 하려면 다른 테마를 찾길 바랐다. 논리적이지 않은 말을 시키면 피곤하다.


엘리베이터에서도 복도에서도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곳에 살다 보면 조용한 것이 낯설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데도 그렇다. 방안은 너무 조용해서 낯설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길 건너 밭이 너무나 푸르기만 하다. 그리고 옆 건물은 주유소이다. 올 때는 보지 못했다. 차들은 한대도 지나가지 않고 저녁 여섯 시가 되지 않은 오월의 저녁은 밝기만 하다. 

나는 졸리고 피곤했다. 이 도시에서는 어떤 흥미로운 감정이 전혀 들지 않았다. 다시 운전을 하고 그나마 사람들과 가게가 있는 작은 도시를 걸어 다닐 계획을 잠시 했다. 하지만 조용한 여기에 그냥 머물고 싶어졌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온 집안의 문을 다 닫아버린 듯 소음이라고는 들리지 않던 동네가 낯설더니 이제는 고요함에 차분히 빠져들었다. 침대에 누워서 뒹굴거리면서 밖에서 들리는 소음에 귀를 기울여 본다. 안 들린다. 아무 소리도 없다.


깜박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새벽이 왔다. 오월의 새벽 여섯 시는 이미 날이 밝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나는 자세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얀 안개가 사방으로 덮여있었다. 어제저녁에 보이던 바로 길 건너 푸르던 밭이 반쯤은 보이지 않는다. 사방으로 오 미터 안쪽으로만 보이는 세상이다. 나머지는 모두 안개에 지배당해 있었다. 

지배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이건 그냥 안개가 덮인 게 아니다. 완전히 사방을 포위해 버린 짙은 안개였다. 일찍 산으로 가려던 내 계획을 버렸다. 나는 남쪽 바다를 향해 내려가기로 했다. 안개 때문에 산의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를 보지 못하면 기를 쓰고 올라간 게 너무 억울할 거 같았다. 안개가 방해물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아닌 안개 때문에 내 계획이 틀어진 것이 살짝 화가 나기도 했다.   


일곱 시도 안되어서 숙소를 나서는데 아직도 짙은 안개가 사방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요함은 어제 그대로였다. 천천히 조용한 도시를 가로질러 길을 떠났다. 낮은 산들이 첩첩이 내가 가는 길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낮은 산들 사이사이에 안개가 머물러 있었다. 너무나 편안해 보였다. 내 옆을 지나는 풍경은 분명히 실물이지만 비현실적인 꿈같은 풍경이었다. 

아침 햇살이 안개 사이사이로 환하게 비췄다. 길 위에서 보는 안개는 새벽에 보았던 안개보다 훨씬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조용한 도시를 스르륵 미끄러지듯이 운전해 갔다. 구름 속으로 둥둥 떠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시인이라도 된 기분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안개가 이렇게 아름답다니. 아무것도 아닌 안개일 뿐인데. 역시 아무것도 아닌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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