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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Feb 12. 2022

모든 것을 가졌으나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영화 / 헨리의 이야기

며칠 전 로펌에 근무하는 변호사들과 점심을 같이 했다. 세상살이가 다 그렇듯, 주된 화제는 먹고사는 문제였다. 요즘 경제가 어려우니 변호사 업계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특히 얼마 전 있었던 지난해 이익에 대한 배당 문제가 화제였다.


선배(파트너) 변호사들은 별로 하는 일이 없는데 수익의 대부분을 가져가는 반면, 실제로 일을 하는 후배(어쏘) 변호사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 불만의 주된 이유였다.


선배 변호사들이 볼 때는 사건을 가지고 온 사람이니 당연히 가져가는 몫이 많아야 한다고 주장할 테고, 후배들은 실제로 의견서를 작성하고 재판에 들어가는 것은 자기들인데 고생한 것에 비해 받는 것이 얼마 되지 않으니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어느 쪽의 말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변호사를 오래 했다면 정확히 알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양 쪽 모두 일리가 있어 보였다.


사건을 수임하지 않으면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으니 수임이 중요하다고 할 것이고, 사건을 수임해도 실제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니 일도 중요하다는 점에서 둘 다 맞는 말이다. 어느 쪽 편을 들기가 어려웠다.





화제를 바꾸기 위해 영화 얘기를 꺼냈다. 아주 오래전에 본 영화 <헨리의 이야기, 1991>이다. 영화를 봤냐고 물어보니 보지 못했다고 한다. 오래전에 개봉한 영화니 30대 중후반인 그들이 볼 수 없었으리라.

주인공 헨리 터너(해리슨 포드 분)는 아름다운 아내(아네트 베닝 분)와 사랑스러운 딸이 있는 뉴욕 유명 로펌의 성공한 변호사이다. 그는 맡는 사건마다 모두 승소한다. 당연히 엄청난 부와 명예가 따라오고, 아내가 있음에도 같은 로펌의 여성 변호사와 내연관계를 맺고 이중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의 의뢰인은 거대 기업. 그는 의뢰인의 이익을 충실히 대변하기 위해 증거조작도 서슴지 않는다. 회사를 대리하면서 회사에 불리한 문서를 숨기고 법정에서 피해자들의 약점을 트집 잡아 피해자들을 곤경에 몰아넣는다. 그 결과 회사 쪽에 불리해 보이는 소송에서 승소한다.


어느 날 그는 연말 파티에서 돌아오는 길에 담배를 사러 가다가 강도로부터 총격을 당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지만 식물인간 상태로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만다. 화려했던 그러나 세상 가치에 오염된 그의 과거는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그는 전직 축구 선수로 재활치료사인 브래들리의 도움으로 다시 걷게 되고 어눌하게나마 말을 하게 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감에 빠진다. 다시 출근한 사무실, 동료 변호사들의 눈길이 예전 같지 않다. 심지어 불륜 관계였던 여 변호사도.


그는 자신이 맡은 사건의 파일을 들쳐보고 비로소 깨닫게 된다. 자신이 얼마나 위선적인 사람이었는지를. 돈과 명예를 위해 해서는 안 될 일도 서슴지 않고 했다는 사실을. 가족, 무엇보다 배우자에게 몹쓸 남편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회심한다. 그리고 자신이 자신이 조작했던 사건의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며 용서를 구하고 그들에게 유리한 문서를 건네준다. 자신의 배우자에게도 바람을 폈던 사실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한다. 대략 영화 줄거리는 이렇다.





불행한 일 속에는 그동안의 인생을 전환시킬 요소가 숨겨져 있다. 헨리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았다면 인간이라면 당연히 지켜야만 했던 소중한 가치를 되찾을 수 있었을까. 사고는 그에게 불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실은 불행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성공한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 성공한 것으로 보였던 것일 뿐, 행복해 보였지만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사고를 통해 그의 실상이 드러난 것이다.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보람 있고 인간적으로 가치 있는 삶일까. 나는 후배 변호사들에게 이 영화의 결론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들 역시 두서없는 내 얘기를 듣고 실은 변호사로서 힘들었다는 말을 하면서 이제부터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야겠다고 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많은 연봉을 받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를 원한다. 그게 나쁜 것도 아니다. 생계를 유지해야 하고,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니까. 문제는 수단이어야 할 그런 것들이 목적이 되어 버리면 사고 전의 헨리와 같은 변호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그렇다고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매일 야근에, 더 많은 사건을 수임해야 하고, 의뢰인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각박한 현실. 그런 생활이 반복되다 보면 경제적인 면에, 오직 이기는 것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힘들고 비루한 상황을 겪으면서 돈으로 보상받고 싶은 심리가 쌓여가는 건 시간문제다. 만약 그게 다라면 우리 삶은 암울하다. 실제로 암울해 보이기도 하고.






관심이 있는 만큼 보이고, 내 관심이 무엇이냐에 따라 삶의 목표와 가치가 달라진다. 세상이 암울해도 우리는 빛을 찾아가야 한다. 그 빛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그 과정이 어렵고, 힘들다고 포기할 수 없다. 우리는 '인간다운'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오늘 후배 법조인들에게 한 이야기는 사실 나한테 한 얘기였다. 늘 그렇듯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기 위해서였다.


얼마 전 오하이오 시골을 지나다가

기념품 상점에 걸린 팻말들을 보았다.

보통은 '판매 완료'라고 써놓을 텐데

'죄송해요, 늦으셨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바로 그거다. 희망의 묘비가 있다면

저 말을 비문으로 새기면 딱 맞겠다 싶었다.



<조지 스타이너, 미국 문학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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