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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Mar 04. 2022

끝없는 하늘 외에는

톨스토이 / 전쟁과 평화

며칠 전, 햇볕이 따뜻하게 비치는 오후였다. 햇빛 속에만 있으면 3월 초가 무색할 정도로 봄기운이 완연했다. 바람도 한결 부드러워진 느낌이었다. 코엑스 몰로 들어가는 입구, 하늘이 열린 공간. 어느 노인이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햇빛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편안해 보이는 것이 뭔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가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가니 맑은 하늘이 보였다. 나도 옆에 잠시 앉아 같은 하늘 아래서 햇볕을 쬐고 싶어졌다. 이런 게 행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햇빛이 뭐라고 이런 생각까지 드는 걸까.


몇몇 날을 빼고 흐린 날이 많았던 지난 겨울, 겨울 특유의 회색빛에 미세먼지까지 겹쳐 밝은 햇빛을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겨울이니까, 당연히 그러려니 했다. 어쩌면 맑은 날이 있었지만 내가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슬쩍 그 비밀을 보여주는 것이 자연의 섭리니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는 프랑스와 벌어진 전쟁에서 부상을 당한 안드레이 공작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뜻밖의 상황으로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가 의식을 되찾고 하늘을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어째서 지금까지 이 높은 하늘이 눈에 띄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제라도 겨우 이것을 알게 되었으니 정말 행복하다. 이 끝없는 하늘 외에는, 모든 것이 공허하고 모든 것이 기만이다."


그는 프랑스와의 전쟁에 러시아군 총사령관의 부관으로 참전한다. 귀족 신분으로 부와 명예를 가졌건만, 뭐가 부족한지 전쟁까지 나가 공을 세우고 싶었던 것이다. 세속적인 욕망을 추구했던 그가 죽음의 문턱에서 올려다본 하늘에 대해 생각하는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동안 전부라고 믿어왔던 명예, 부와 욕망이 얼마나 헛되게 여겨졌을까. 그동안 쓸모없다고 크게 눈여겨보지 않던 것의 숨겨진 가치를 깨닫게 되었을 때 그 느낌이 어땠을까.


햇볕을 쬐고 있는 이름 모를 그 노인을 보면서 문득 요즘 읽고 있는 이 장면이 떠올랐다. 그도 안드레이 공작처럼 지난 시절, 그렇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아무도 주목하지 않게 된 지금에서야 자신에게 내리는 한줄기 햇빛이 얼마나 소중한지 뒤늦게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오늘의 햇빛이 달리 보였다. 그냥 흔하게 보던 햇빛이 아니었다. 삶에서 소중한 건, 이런 순간이다. 아름다움은 이런 소중한 순간들이 쌓여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형상이었음을 나는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나에게 주어졌던 모든 것은, 비록 사소해 보였어도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비치는 햇빛조차도 어떤 사람에게는 소중한 삶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자신을 찾아온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무엇을 도와주면 좋겠느냐고 묻자 그가 했던 첫마디가 "조금만 비켜주시오. 햇볕을 가리지 않게."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이 왕이 아니면 디오게네스처럼 되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로 그를 존경했다.


아마 디오게네스는 일찍이 깨달았을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보다는 자신을 비추는 한줄기 햇빛이 더 소중함을. 부와 명예, 권력의 덧없음을. 그리고 실천했다. 가난하지만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자족생활을.


왜 우리는 나이가 들어서야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일까. 나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이 느껴져야 비로소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절박하거나 간절하지 않으면 피부에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었던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었던 내일임을 말이다.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의 말도 다르지 않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프레임으로 세상을 살면, 매 순간순간이 중요해진다. '여기, 지금'이라는 가르침은 청년들에게는 암기를 요하는 지식이지만, 노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삶의 호흡이다."

한줄기 햇빛이 나에게 가르쳐 준 깨달음을 소중히 간직하고 싶어졌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을지도 모르는 때가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 역시 그동안 살면서 소중했던 사람들, 시간들, 장소를 잃었기 때문이다.


산다는 건, 그렇게 무언가를 끊임없이 잃어가고, 잃었던 것을 그리워하는 과정이다. 이미 지나가버렸기 때문에 다시 그들을, 그것들을 내 삶으로 불러낼 수 없다. 다시 <전쟁과 평화>에서 안드레이 공작이 비록 적이지만 그의 영웅으로 숭배했던 나폴레옹을 대면하고 느꼈던 감상이다.


'그는 오늘 그가 발견하고 이해한 드높고 공평하고 선량한 하늘에 비하면 지금 나폴레옹의 마음을 차지한 온갖 흥미는 부질없다고 느껴졌고, 그 천박한 허영심과 승리의 기쁨도, 그의 영웅이었던 나폴레옹까지도 모두 하찮게 여겨졌다. 그는 나폴레옹의 눈을 보면서 위대함의 부질없음,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부질없음, 살아 있는 자는 누구도 그 뜻을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죽음의 더한 부질없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안드레이 공작처럼 삶의 본질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비로소 햇빛이 눈에 들어온다. 겨울이 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지나가버렸다. 나는 오늘 다시 이 사실 또한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지나가버린 것, 그것이 인생임을.

https://youtu.be/L3o0V2IbSfk

한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는 있지만

한 가지 자유는 빼앗아 갈 수 없다.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삶에 대한 태도만큼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다.


<빅터 프랭클 _ 죽음의 수용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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