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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May 28. 2022

낯선 여인에게서 편지가 온다면

슈테판 츠바이크 / 낯선 여인의 편지

"당신은 그것을 느끼지 못했지요. 마치 당신이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시계태엽의 긴장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요. 시계태엽은 어둠 속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당신의 시간을 재고 심장 박동 소리와 함께 당신과 늘 같이 하는데도 당신은 성급한 시선을 수백만 번 똑딱거리는 초점 위로 단 한 번 힐끗 던질 뿐, 시계태엽의 긴장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평생 한 남자를 사랑한 여인, 그녀는 생의 마지막 순간 그에게 편지를 쓴다. 평생 사랑했지만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던 그 남자를 위해서 쓰는 편지는 답장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녀 스스로에게 쓴 유언장이나 다름없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낯선 여인의 편지> 속 여인의 이야기다. 평전이나 역사서를 쓴 것으로 유명한 츠바이크가 이렇게 아름답고 애절한 단편소설을 쓰다니 놀라웠다.


비슷한 인물은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 나오는 주인공 플로렌티노 아리사가 있다. 평생을 한 사람을 사랑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그는 사랑하는 여인과 마지막을 함께 했지만, 소설 속 여인은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제 아이가 어제 죽었습니다'라고 시작되는 편지, 그러나 남자(유명한 소설가로 나온다)는 편지를 쓴 여인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 아이가 잠깐 불장난처럼 스치듯 관계를 가졌던 여인이 낳은 자신의 아이라는 사실도. 여인은 아이를 평생 혼자 키우면서 아이가 죽자 자신도 죽기로 결심하고 남자를 향한 평생에 걸친 사랑을 편지에 담아냈다.


사연이 없는 사랑은 없다. 대부분의 사랑은 엇갈림과 안타까움 속에서 세월과 함께 점점 잊힌다. 평생 어떻게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아닌가. 광기에 사로잡히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랑이 도대체 뭐라고.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희귀한 이야기를 통해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다. 남자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설렘과 기대, 그 후 남자를 잠깐 만나 사랑을 나누며 느꼈던 희열, 남자가 떠나고 홀로 남아 아이를 키우며 이제는 자신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원망과 좌절, 그녀만이 간작한 그와의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비밀이 고스란히 편지가 되었다.


'오로지 당신, 오직 당신만이 저를 잊어버렸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원망일까, 아니면 저주일까. 아니다. 그에 대한 사랑을 그에 대한 섭섭한, 원망하는 듯한 글로 표현한 것뿐이다. 마지막 편지에 담긴 이 글을 굳이 읽지 않더라도.


'사랑하는 그대, 잘 사십시오. 사랑하는 그대여, 행복하세요. 당신에게 감사드립니다. ....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 다 좋았습니다. ....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까지 당신에게 감사할 겁니다. 전 지금 편안합니다. 당신에게 모든 것을 다 말했으니.'


남자에게는 잠깐 스쳐가는 인연에 불과했지만 그래서 언제나 낯선 여인으로 남았지만, 여인은 끝내 자신의 신분이나 감정을 밝히지 않으면서 남자가 자신을 기억해 주기만을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여인의 집착을 광기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쩌랴. 사랑의 본질은 광기인 것을, 그 사람에 대한 집착인 것을, 그래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집념인 것을. 자기 연민과 자기 헌신, 슬픔과 고통인 것을. 한없는 안타까움인 것을.


'저를 결코 결코 알아보지 못한 당신, 물처럼 제 곁을 그냥 스쳐 지나가는 당신, 거리의 돌을 밟고 지나가듯 저를 밟고 지나가는 당신. 늘 멀리 떠나서 저를 영원히 기다리게 하는 당신은 제게 어떤 존재인가요? 한때는 당신을 붙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떠다니는 공기처럼 덧없는 당신을...'

'그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여인을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을 생각하듯 육체 없이도 정열적으로 생각했다.' 남자 역시 이젠 깨달았다. 그녀가 자신을 평생 사랑했다는 사실을. 자신의 부도덕함과 무심함을. 비로소 낯선 여인에서 오래전 알고 있었던 연인으로 바뀐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나는 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을 따라 하고. 그렇게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녀의 이 고백처럼.


'... 전 당신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습관, 당신의 넥타이, 당신의 양복을 다 알고 있고, 당신의 지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구별할 수도 있으며, 누가 당신의 마음에 들고 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도 나눌 수 있지요. 매 순간 나는 당신 속에 살았답니다.'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해 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알랭 드 보통 _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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