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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un 08. 2022

외설과 위선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 채털리 부인의 연인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만큼 논란이 많았던 소설도 드물다. 고등학생일 때 문고판으로 나온 책을 몰래 읽었던 기억이 난다. 논쟁적이었던 만큼 충격도 작지 않았다(물론 그때는 어렸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 이번에는 원문에 충실한 2권짜리 정식 번역본으로 건너뛰지 않고 전부를 끝까지 읽었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장면, 묘사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로렌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분명하다. 자극적인 성적인 것이 아닌 '소외' 문제였다. 계급사회에서는 계급으로부터, 산업사회에서는 재물로 통칭되는 물질로부터, 남녀 사이에서는 우월적인 지위에 있는 이성(그 시대는 남성이었다)으로부터. 그는 중심에 있어야 할 인간이 정작 인간 자신을 소외하는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했던 것이다.


주인공 코니 역시 남편으로부터 오랜 기간 소외되었다. 연인 멜러즈 역시 계급사회, 산업사회 그리고 무엇보다 전 배우자로부터 소외된 인간이었다. 둘에게 있어 사랑은 소외 문제를 해소하는 하나의 출발점이었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따라서 윤리적인 잣대만으로 그들의 사랑이 불륜이라고 비난할 수 없다.




사람들은 이 소설이 외설적이라고 한다. 성적인 묘사가 지나치다고 하나(그 이유로 판매금지처분이 되었다), 연인 간의 사랑을 솔직하게 묘사했다고 외설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오히려 자신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겉으로는 도덕적인 체하면서 내면으로는 온갖 음란한 생각을 하거나 배우자 몰래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낫다.


로렌스는 당시 자신이 살았던 세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세상이 그토록 많은 거짓으로 뒤덮여 있지 않다면, 나는 작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만 그랬을까. 인간이 발 딛고 있는 곳이라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지금도 로렌스의 말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위선을 뒤돌아봐야 한다. 무엇이 외설인지, 비도덕적인 지도.

주인공 코니는 멜러즈와 왜 사랑에 빠졌을까? 그녀는 연인 멜러즈에게 이렇게 말한다. “다른 사람이 갖지 않고 당신만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 줄까요? 그것은 당신 특유의, 부드러움에 대한 용기지요.”


부드러움은 상대에 대한 배려이다. 꾸밈없이 부드러움을 드러내기 위해선 용기 또한 필요하다. 자격지심, 자존심도 버려야 한다. 멜러즈가 코니에게 보여주었던 건 부드러움과 이를 솔직히 드러낸 용기였다. 그는 코니와 관계를 가질 때도 그만의 방식으로 코니를 배려한다.


마지막에 코니는 이렇게 말한다. "여자란 자기 인생을 살든지, 아니면 그렇게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되든지, 둘 중 하나란다. 정말이야!"


코니는 그런 면에서 뒤늦게라도 자기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멜러즈와의 사랑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주체적인 삶에 대한 자각 그리고 실천,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코니의 삶과 사랑을 통해 위선적인 그 시대의 세태를 풍자한 것도.




"그는 언덕 꼭대기로 가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결코 작업을 멈추지 않는 스택스게이트에서 기계를 질질 끄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작업장에서 일렬로 환하게 빛나고 있는 전깃불 말고는 빛도 거의 없었다. 세상은 어둠에 깔리고 자욱한 연기에 싸여 잠들어 있었다. 두 시 반이었다. 그러나 잠들어 있어도 세상은 불안하고 잔인했다. 기차나 도로 위를 달리는 대형 트럭 소리로 흔들리고, 용광로에서 솟구치는 장밋빛 불길로 번쩍거렸다. 그것은 철과 석탄, 철의 잔인함과 석탄의 연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몰아대는 탐욕을 끝없이 내뿜고 있는 세상이었다. 탐욕, 오직 탐욕만이 모두가 잠든 세상에서도 들썩거리고 있었다.


날이 추워서 그는 기침을 했다. 상쾌하고 차가운 바람이 언덕 위로 불어왔다. 그는 그 여자를 떠올렸다. 자신이 갖고 있거나 갖게 될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지금 이 순간 그녀를 다시 따뜻하게 품에 안고 함께 담요를 덮고 잠들고 싶었다. 영원을 꿈꾸는 모든 희망과 과거에 얻은 모든 것을 내주고서라도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와 한 담요를 따뜻하게 덮고 함께 잠을, 오직 잠을 자고 싶었다. 그 여자를 품에 안고 자는 일만이 지금 유일하게 필요한 일처럼 느껴졌다."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_ 채털리 부인의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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