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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Apr 05. 2022

쓸쓸함이 전해져서

경복궁 / 산책

"빛과 그늘은 어디에나 있다. 세상 안에도 있고 자기의 삶 안에도 있다. 그늘보다는 빛을 사랑하고 밝은 곳을 찾아가는 것이 세상과 사람 사는 일의 당연한 순리다. 하지만 때로 세상의 그늘진 곳들을 눈여겨보는 일이 필요하다.


지금은 망각해버린 찬란한 세상에의 꿈을 거기에서 다시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병든 몸처럼 삶이 처한 그늘진 곳을 새삼 돌아보는 일도 중요하다. 다름 아닌 거기가 그동안 살아보지 못한 다른 삶이 날개를 푸덕이는 둥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김진영 _ 낯선 기억들>

지난 주말 늦은 오후, 걷다가 경복궁을 지나게 되었다. 봄이라 그런지 나들이를 나온 상춘객에 코로나 백신 반대 시위대까지 겹쳐 경복궁 주변은 사람들로 무척 붐볐다. 늘 지나가면서 보던 곳이라 별다를 것이 없는데도 이날따라 이상하게 나를 사로잡는 무엇이 있었다. 경복궁이 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경복궁, 지금도 우아함과 아름다운 자태를 잃지 않고 있는 궁궐 중의 궁궐,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의 시대정신을 담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면서 처음으로 지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정궁이다.



한낮의 햇볕을 받아 더욱 눈부신 이 궁궐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아름다움보다는 쓸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인을 잃어버린 경복궁,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고 사적史蹟으로만 관리되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낮에는 관람객들로 붐비지만, 밤에는 아무도 없이 적막만이 지배하는 곳이다. 마치 살아 있을 때는 존엄한 인간이 죽으면 화물로 취급되는 것처럼, 사랑할 때는 둘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혼자서 살아가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처지다.


유구한 세월이 흘러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지만 궁궐로서의 생명은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왕조는 이미 역사적인 수명을 다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경복궁은 주인 없이 쓸쓸히 남겨졌다.


화려했던 시절은 사라져 버리고 유적으로만 기억되는 경복궁,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하니 경복궁이 마치 나한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영수야, 나를 찾아와 주었구나. 요즘 주말마다 네가 내 주변을 지나가면서 나를 바라봐 줘서 덜 외로웠는데.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오지. 그런데 너 같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사람은 별로 없었어. 정말 내가 그렇게 처량하고 쓸쓸해 보이는 거니? 네 눈빛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구나.


하긴, 주인이 떠나 나만 혼자 남았으니 그렇게 느낄 만도 하지. 이렇게 산 지 벌써 오래되었어. 이 말을 하고 보니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구나. 참 많은 일들을 겪었지. 즐거운 일보다는 힘든 일이 더 많았단다. 한마디로 험난한 세월을 살았던 거지.


왕이 살고, 중요한 정사가 논의되는 곳이다 보니 한때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떠받들었어. 자부심도 많았지. 나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정궁이었으니까. 그때는 내가 역사의 중심이었지. 모든 사람들이 감히 나를 쳐다보지도 못했단다.


이제는 그런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아. 나도 내 주인과 함께 사라졌어야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나만 남게 되었구나. 지금도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 한편으론 기쁘지만 예전 같은 자부심이나 내가 중심이라는 그런 생각은 없단다. 그들은 잠시 왔다가 곧 가거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나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야. 나보다는 다른 데 관심이 더 많지. 무엇보다 사진을 찍느라고 바빠. 너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은 드물었어.


오늘은 네가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니 나도 마음이 좀 그렇단다. 내 쓸쓸함이 너한테 전해진 건지 아니면 네 쓸쓸함 때문에 네가 그렇게 느끼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누구나 나이가 들면 쓸쓸함만 남듯이, 나도 다를 바 없거든.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때가 되면 사라지게 마련이니까. 나도 언젠가 그렇게 될 거야. 어쩌면 이미 내 생명은 다했는지도 몰라. 중요한 건 내 안에 서린 정신과 유산인데, 그 정신은 이미 조선 왕조가 망하면서 사라졌거든. 불가피한 일이지만 씁쓸한 거지.


네가 자주 찾아와 주면 고마울 것 같아. 나는 늘 외롭거든. 특히 아무도 없는 밤이 되면 특히 더 그래. 내가 여기 있는 한, 아니 언젠가 사라지더라도 너는 나를 기억해 줄 수 있겠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잊어버리더라도.’




꽃이 절정인 날은 이제 겨우 며칠뿐. 그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봐 두어야 한다. 아름다운 건 금세 사라지고 마니까. 꽃이 아름다운 건 순간을 피다가 지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무너진 일상, 기회는 오직 ‘지금’ 밖에 없다고 경복궁은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4월의 첫 번째 주말도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이날은 먼 훗날 나에게 어떻게 기억될까? 아마 경복궁의 쓸쓸함을,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깨달은 하루로 기억할 수도.

"흐른다는 건 덧없이 사라진다는 것, 그러나 흐르는 것만이 살아 있다. 흘러가는 '동안'의 시간들. 그것이 생의 총량이다. 그 흐름을 따라서 마음 놓고 떠내려가는 일. 그것이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자유였던가..."


<김진영 _ 아침의 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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