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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May 12. 2023

내가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나를 이해하고 사랑한다

저는 주말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고궁 근처를 걷습니다. 딱히 대단한 이유는 없습니다. 고궁 주변이 그나마 사람이 덜 붐볐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 격리가 풀리고 청와대가 개방된 요즘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한때는 그랬습니다.


제가 자주 걸었던 길은 경복궁과 청와대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조용하고 사색하면서 걷기 좋은 길입니다. 그리고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길도 빼놓을 수 없네요. 저는 가급적 안에는 들어가지 않고 그 주변을 이리저리 걷습니다.


제가 고궁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보다는 우리 옛 건물들이 정겨워졌기 때문입니다. 중국 북경에 있는 자금성에 비해 조선시대 정궁은 사람을 압도하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절제미와 균형미까지 더해져 제 눈에는 가장 완벽한 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으니까요.   

그날도, 오후쯤이었을 겁니다. 저는 길게 이어진 광화문 경복궁 돌담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날따라 왠지 처연하다고 할까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수수한 자태를 지닌 고궁의 미에 시선을 빼앗긴 탓인지, 평소에는 제 나름의 보폭으로 걷는데, 그날따라 그 보폭마저도 잊어버렸습니다.


궁 밖에서 바라다 보이는 우뚝 솟은 궁궐들, 다른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사람이 살고 있지 않고 관광객들의 사진 찍는 대상으로 전락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웠습니다. 특히 제 시선을 사로잡았던 건, 궁 안과 밖을 경계 짓는 담장이었습니다.


제가 모르는 온갖 풍상을 다 겪었을 것을 상상하니 마음 한구석이 찡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궁에 맡기고 묵묵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했던 담장, 곳곳이 금이 가 있었지만 단아하고 기품 있는 모습은 여전했습니다. 규칙적이고 같은 문양이 반복되는데도,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로베르트 발저의 말처럼 '제가 본 것은 작고 빈약했으나 동시에 위대하고 의미 깊었으며, 소박하지만 매혹적이었고, 가까이 있으면서도 훌륭했고, 따스하면서도 사랑스러웠습니다.'


정제된 미, '아, 이게 진정한 아름다움이구나!' 선조들의 미적인 감각에 감탄했습니다. 시선을 돌려 우리 시대에 세워진 건축물을 보니, 웅장하지만 뭔가 빠진 것 같았습니다. 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비슷한 형태, 편의와 효용만을 강조한 건물양식. 아쉬웠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을 헐고 다시 세웁니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해봤자 왕이 살았던 궁궐과 일부 한옥뿐입니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모두 헐고 새로 지어야만 할까요? 효율과 편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려야 할까요? 지금도 오래된 건물을 헐고 자꾸 새로운 건물을 늘려 갑니다. 최근에 철거하기 위해 폐쇄된 남산 힐튼호텔만 해도 그렇습니다.

고궁 근처를 산책하고 나면 뭔가 달라진 저를 발견하곤 합니다. 그전과는 달리 마음이 풍요로워졌다고 할까요. 세상을 보는 눈이 다채로워졌습니다. 산책하기 전과 산책한 후의 제가 같은 사람이 맞는지 가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외모는 별로 차이가 없을지 몰라도,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산책을 통해 저의 내면을 살펴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산책하면서 사색하는 것을 즐겼던 스위스 출신 작가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1878 - 1956)는 <산책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지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 다시 나 자신이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종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지만, 그 다른 사람이 바로 내가 잃었다가 찾고 싶었던, 내가 되고자 했던 그 사람이기 때문에 바로 나 자신이 된 것이라는 의미라고 저는 받아들입니다.


그는 또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이해하고 사랑한다." 수수께끼 같은 말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맞는 말입니다. 이 세계를 사랑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래야지만 비로소 세상도 우리를 이해하고 사랑하지 않을까요?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먼저 그를 이해하고 사랑해야, 그도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먼저 내미는 내 손끝에, 내 관심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고궁 근처를 산책하면서 고궁의 기쁨과 아픔을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 침묵 속에 있었던 고궁이 저에게 그렇게 말을 걸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보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세상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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