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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May 10. 2023

오월,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아주 오랜만에 커피를 내렸다. 예전에도 종종 커피를 내려서 마신 적이 있었다. 언제부턴가 그러지 못했다. 커피를 한동안 끊었던 것이 영향을 미쳤겠지만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 더 정확한 이유이다. 그라인더로 커피 원두를 갈고 뜨거운 물로 원두가루를 적시며 드리퍼로 내리는 그 잠깐의 시간마저도 아까웠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4월이 가고 5월이 왔지만 딱히 달라진 건 없다. 하긴, 뭐가 달라지겠는가. 내가 그대로인데. 또 하나가 지나가면 또 하나가 다가오고 그런 생활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무덤덤해진다. 오늘은 커피 잔을 두 손으로 안고 천천히 마셨다. 커피가 식는 시간마저 아까워서 그 시간에 책을 보거나 신문을 봤는데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잠깐의 시간이라도 나를 위해 쓰고 싶었다.


오늘 마신 원두는 재스민 향이 짙게 배어 있는 파나마산(産) 게이샤 원두, 커피 향이 부드럽고 은은했다. 산미도 느껴졌다. 커피는 원두에 따라, 또 내리는 사람의 손길과 물의 온도, 방법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한동안 커피의 이런 매력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아무리 좋은 원두라도 사람의 마음에 따라 맛과 향이 묘하게 달라지는 법, 커피 역시 마시는 사람의 마음에 많이 좌우된다.


뜨거운 커피가 몸 안으로 들어가 구석구석까지 퍼지는 느낌, 모든 감각이 살아나고 머리가 맑아져 다시 의욕이 솟는다. 아마 커피를 직접 내리면서 잠깐이나마 지금 이 순간에 집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창밖으로 멀리 내다보이는 하늘이 보기 좋았고 고요한 아침 시간도 좋았다. 모든 것이 어제와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그래서 안정적이다. 때로 이런 시간들이 지루하고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마음을 달리 먹으면 오히려 편안한 시간이 되기도 한다. 나는 어느 순간 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예상치 않은 일들로 일상이 깨지는 순간, 안정적이고 변함없었던 이 시간이 그리울지 모른다고.


하루하루가 지나고 사무실과 집을 오가는 생활, 틈틈이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고 잠깐 짬을 내 글을 쓰고 산책하는 일상. 허투루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는, 그래서 무언가 건져야 한다는 욕심과 나 자신의 한계 사이에서 방황하다 보니 어느덧 봄날이 저 멀리 가버렸다. 5월은 10월보다 덜 쓸쓸하다. 봄이 주는 활력과 생명의 풍요로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피천득 시인의 <오월> 시인의 말대로 정말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이 슬금슬금 내 곁을 지나가고 있었다. 머문 듯 흘러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붙잡는다고 붙잡아지지 않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을. 뒤늦은 깨달음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쓸쓸해졌다.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


스물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

(얻었도다, 사랑의 고통을)

失了愛情痛苦

(버렸도다, 사랑의 고통을)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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