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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May 26. 2022

여백(餘白)


지난 며칠간 아침, 저녁으로 공기가 선선했다. 마치 초가을 날씨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지난 주말, 걷는 것도 상쾌했다. 얼마 전 청와대가 개방되면서 내가 종종 걸었던 삼청동과 청와대 쪽은 평소보다 사람들로 무척 붐볐고, 특히 청와대 안은 인산인해였다. 청와대를 지키는 경비나 경찰도 많이 줄어 경직되었던 동네 분위기도 한결 나아졌다.


그러나 뭔가 한적한 분위기를 기대한다면 당분간 이 길을 추천하고 싶지 않다. 조용하고, 비교적 사람들로 붐비지 않아 주말에 이 길을 종종 걷곤 했는데, 이제 다른 길을 알아봐야 할 것 같다.


코로나19 제한 조치도 풀렸고, 바야흐로 걷기 좋은 계절이 되었다. 환경과 계절은 좋은데, 아쉬운 게 없지는 않다. 생각해 보면 그 아쉬운 부분 때문에 삶의 깊이가 생기니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한때 내 삶에도 여유가 있었으면 하고 바랬던 적이 있었다. 바쁘게 일에 치여 살 때였다. 여유롭게 걷는 사람들,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웠다.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끝나면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하면서도 막상 하던 일이 끝나면 또 다른 일이 밀려왔다. 정신없이 일 속에 파묻혀 지내다 보면 세월은 어느덧 저만큼 멀리 가 있었다.


가끔은 특별한 용도가 없는 시간도 필요한데, 나는 그런 시간을 누리지 못했다. 부담 없이 낭비해도 되는 그런 시간. 멍 때리기를 조금 더 격상시켜 표현하면 명상, 사색이라고 할 수 있다. 비워야 채울 틈이 생기듯,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시간을 여백 없이 빼곡히 채우기만 하면 숨 쉴 틈조차 없어지고 만다.


원래 아쉬운 게 없는 사람은 사는 재미를 별로 느끼지 못하는 법이다. 부족한 듯, 약간은 아쉬운 듯 살아야 살아갈 의욕도, 삶에도 여유, 즉 여백餘白이 생긴다. 여백은 양면성을 갖고 있다. 꽉 막힌 현실에서는 한숨 돌릴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 사람에 따라서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함으로 남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여백이 주는 부정적인 면, 공허함과 외로움 때문에 한때 힘들었지만, 여백이 주는 긍정적인 면에 주목하면서 이제는 그 여백이 그다지 싫지만은 않아졌다. 어차피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다면, 남들이 갖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을 내가 누리고 살라는 보장이 없다면, 마음을 고쳐먹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여백의 내용만 다를 뿐, 여전히 일정 부분을 결핍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실존이다. 그게 건강이 되었든, 물질적인 부가 되었든, 명예가 되었든, 가족 간의 소소한 재미가 되었든 모든 것을 다 누리고 살 수 없다.


내일 죽어도 아쉬움이 없는 인생, 그게 잘 사는 인생이 아닐까. 많이 가진 자는, 무엇보다 지금 남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는 자는 죽는 것도 쉽지 않다. 작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고, 소소하고 때로 사소해 보이는 일상 속에서도 기쁨을 찾는 사람은 그런 사람보다 편하게 죽을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 건, 얼마 전에 들렸던 애플스토어 명동의 영향이 컸다. 내가 말하는 여백도 애플이 추구하는 심플, 단순함과 닮았기 때문이다. 아, 내 삶도 그렇게 심플하고 단순했으면, 아니 나 자신이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나는 애플스토어를 둘러보면서 생각했다. 너무 복잡하게, 스스로를 어떤 틀에 옭아매면서 살아가고 있으니 힘겨울 수밖에 없다고.


세상이나 사람들에 대한 기대를 많이 줄였다는 점에서는 과거보다 진전이 없는 건 아니지만, 다른 면은 여전히 부족하다. 틀에 박힌 일상, 꽉 짜인 시간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답답함, 뭔가를 해서 채워야 한다는 강박증,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삶이 피곤해지고 말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는 그의 저서 <월든>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끔은 일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으로 시간을 보냈다. 꽃처럼 활짝 핀 어느 순간의 아름다움을, 육체적 일이든 정신적 일이든 일을 하느라 희생할 수는 없는 때들이 있었다. 나는 내 인생에 넓은 여백이 있기를 원한다."


소로우처럼 나도 지금보다 더 넓은 여백을 지닌 사람이 되었으면,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지금보다 더 여유롭게 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자신은 물론이고, 타인에게까지 여백을 줄 수 있는 사람이란, 주어진 상황을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닐까. 그때의 여백이란 삶을 있는 그대로 관조할 수 있는 여유일 게다.


그렇게 여백을 넓혀가다 보면, 스스로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서도 나를 비워둘 수 있게 된다. 어느 순간 나는 사라지고, 그 사람만 돋보이게 하는 순간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여백을 지닌 사람의 완성된 모습이 아닐까. 프랑스 수필가 도미니크 로로(Dominique Loreau) 역시 <심플하게 산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백이 있는 방은 빛으로 채워진다. 물건이 거의 없는 방에서는 찻잔 하나도 존재감을 가진다. 책 한 권이나 친구의 얼굴도 마찬가지다. 여백이 있는 공간에서는 모든 게 작품이 되고 매 순간이 소중한 시간이 된다."

* 사진은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국보 금동반가사유상 2점을 전시한 <사유思惟의 방>이다. 잡념조차 빨아들이는 이 방을 설계한 사람은 건축가 최욱 선생이다. 담백하고 정갈한 한국적인 미를 구현하는 건축가로 유명한 분이다.


여백의 미가 무엇인지 깊이 사유하게 만드는 전시였다. 2점의 반가사유상이 빛난 건 그 뒤를 받치고 있는 순전한 여백 때문이다. 여백이 있는 공간에서는 모든 게 작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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