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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un 02. 2022

쓸쓸한 가운데 옛일을 생각하면


그제는 평소와 달리 귀가 시간이 늦었다. 코로나19로 보기 어려웠던 후배 검사들과 아주 오랜만에 다시 뭉쳤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미국에서 법무협력관을 마치고 3년 만에 귀국한 검사도, 오래 연락이 끊어졌던 검사도 있었다. 대부분 서울 근교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가까운 거리가 아니어서 모두 다 모인 건 7시가 훌쩍 지난 뒤였다.


늦게 만났으니 늦게 헤어질 수밖에.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이야기에 열중하다 보니 시간은 어느덧 10시, 내일 출근하기 위해선 이제 집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집에 오니 11시. 퇴근 후 늘 하던 산책도 할 수 없어 잠시 집 주변을 가볍게 걸었다.


밤이 늦어서 그런지 거리는 한산했다. 피곤했지만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다가 새벽녘에 깨고 말았으니, 다음날 컨디션이 별로인 건 당연한 수순이다. 어제 점심시간, 사무실 주변을 걷는데 발에 모래주머니를 찬 것처럼 걸음이 무거웠다.


역시 잘 자는 것이 중요하다. 컨디션이 별로니 생각도 부정적으로 흐른다. 만사가 귀찮고 의욕이 없다. 그때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에 지난 모든 일들이 후회스러워지고 만다.


차라리 그러지 말았으면 별생각 없이 살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 지난 일 곱씹어 봤자 나만 손해라는 걸 잘 알면서도 뒤를 돌아보면 자꾸 그런 방향으로 생각이 흐른다. 그게 나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동안 살면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 중에는 헤어지고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그때뿐, 그런 사람들은 빛처럼 왔다가 빛처럼 사라진 것이다.





김연수 작가는 <청춘의 문장들>에서 이렇게 말했다. "때로 쓸쓸한 가운데 가만히 앉아 옛일을 생각해 보면 떨어지는 꽃잎처럼 내 삶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하나 둘 보인다. 어린 시절이 지나고, 옛일이 그리워져 자주 돌아보는 나이가 되면 삶에 여백이 얼마나 많은지 비로소 알게 된다."


우리 삶에도 여백이 필요하다. 안 그래도 꽉 짜인 틀에 맞춰 사는데 숨 쉴 공간마저 없으면 답답함을 넘어 삶 자체가 질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백이 있는 동양화를 보면 우리 눈에 익숙한 것을 떠나 마음이 편해지는 건 그런 이유일 터다.


문제는 여백도 적당히 있어야지 너무 많으면 공허해진다는 것, 나는 그 여백 때문에 힘든 적도 있었다. 김연수 작가는 자신이 존경했던 소설가 김소진, 시인 김현, 가수 김광석의 죽음을 떠올리며, 심지어 김일성의 죽음까지 기억하면서 지나간 청춘 시절을 그리워했다.


그러고 보니, 내 곁을 떠난, 그게 이별이든 죽음이든, 사람은 작가보다 훨씬 더 많다. 그렇다면 나도 작가만큼 지난 시절을 그리워할 만한 자격은 충분한 것이다. 너무 그래서 문제지만.




지나가버린 것, 그게 인생일진대 그 사실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다 보면 이내 힘들어진다. 흘러가는 강물처럼 우리 역시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흘려보내고, 지금을 잘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게 마음처럼 잘되지 않는다. 생각마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으니 역시 인생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별로 없는가 보다.


내 문제는 기동성이 떨어진다는 것, 현실에 맞춰 나를 세팅해야 하는데도 쉽게 그러지 못한다는 거다. 연연하고 그리워하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러다가 그 미련이 깊어지면 혼자서 괴로워하고. 그건 꼭 정이 많아서, 정에 굶주려서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아무튼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 무슨 소용이 있으리. 김연수 작가의 글 마지막 부분에 인용한 두보의 시에 내 마음이 담겼으니 그 시로 이 아름다운 봄날 위안을 삼는 수밖에는.


"그렇게 내가 사랑했던 이들이 국화꽃 떨어지듯 하나 둘 사라져 갔다. 꽃이 떨어질 때마다 술을 마시자면 가을 내내 술을 마셔도 모자랄 일이겠지만, 뭇 꽃이 무수히 피어나도 떨어진 그 꽃 하나에 비할 수 없다는 사실은 다음날 쓸쓸한 가운데 술에서 깨어나면 알게 될 일이다.


그 빈자리들이 그리워질 때면 이렇게 시작하는 두보杜甫의 시 <뜰 앞의 감국 꽃에 탄식하다, 歎庭前甘菊花>를 읽을 만하다."



처마 앞 감국의 옮겨 심는 때를 놓쳐

중양절이 되어도 국화의 꽃술을 딸 수가 없네

내일, 쓸쓸한 가운데 술에서 깨고 나면

나머지 꽃들이 만발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


簷前甘菊花移時晩  靑蘂重陽不堪摘

明日蕭條盡醉醒  殘花爛漫開何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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