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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을 채우는 시간

by 서영수

어떤 책이든,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읽기 전과 읽은 후는 분명히 다릅니다. 박완서 작가는 그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책을 읽는 재미는 어쩌면 책 속에 있지 않고 책 밖에 있었다. 책을 읽다가 문득 창밖의 하늘이나 녹음을 보면 줄곧 봐 온 범상한 그것들하곤 전혀 다르게 보였다. 나는 사물의 그러한 낯섦에 황홀한 희열을 느꼈다."


저는 이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책은 단지 활자를 넘기는 행위가 아닙니다. 책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고, 그 시선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러니 책을 읽는 것은 아름답고도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생각 없이 읽으면 금세 잊힙니다. 흘러가는 정보로만 남고, 마음에 남는 깊은 울림은 없거나 있더라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읽는 데 머물지 말고, 고민하고 곱씹고 질문해야 합니다. 생각이 따라오지 않으면 책을 통해 얻었던 지식이나 지혜, 세상을 보는 시선은 금방 휘발되고 맙니다. 그나마 책이 영상보다 나은 이유는 생각할 여지를 남기는 '여백', 모든 것을 활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책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자의 반 타의 반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거나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독자는 그 빈틈을 스스로의 시선과 해석으로 채워 넣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비로소 우리의 사고는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잊힙니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이유도, 그 사랑이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쉬움이 되었든, 안타까움이 되었든, 여운이 남았기 때문에 마음 한 켠에 오래 기억되는 것이지요. 독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다 읽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할 여지가 남을 때 비로소 나에게 남는 무언가가 있게 됩니다.


놀기 좋은 계절은 곧, 책을 읽고 생각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그 계절의 한가운데서 책과 함께 나만의 여백을 채워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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