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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기 위해 지켜야 했던

by 서영수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반드시 지켜야 할 선이 있다. 친하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사적인 영역을 자주 침범하면, 오히려 반감을 살 수 있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가족 사이에서도 각자의 생각과 공간을 존중해야 비로소 건강한 관계가 유지된다.


나 역시 상대에 대한 '관심'과 '배려'라는 이름으로 그 선을 넘은 적이 있었다. 결국 섭섭함과 불편함으로 서로 힘들어하다가 관계가 점차 멀어졌다. 그때 미시마 유키오의 <봄눈>에 나오는 이 대목을 읽고 나 자신을 돌아보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소설의 주인공 기요야키와 그의 친구 혼다는 서로의 집을 오갈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혼다는 까다롭고 섬세한 성격의 기요야키가 마음을 열었던 유일한 동성 친구였다. 그렇다면 혼다는 어떻게 기요야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정을 지키기 위해 선을 지켰던 것이다.




갑자기 혼다가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기요아키! 너 요즘 무슨 일 있는 것 아냐? 내가 어떤 말을 해도 건성으로 듣고 있군."


"그런 것 아냐." 허를 찔린 기요아키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그는 아름답고 서늘한 눈으로 친구를 바라보았다. 친구가 자신의 불손함을 알게 되는 것은 부끄럽지 않았으나 고민을 들키는 것만은 무서웠다.


여기서 만약 그가 흉금을 털어놓았더라면 혼다가 서슴없이 그의 마음속에 발을 들여놓을 것은 뻔했고, 누구에게도 그런 행동을 허락할 수 없는 기요아키로서는 이 하나뿐인 친구도 금세 잃게 될 터였다.


그러나 혼다도 즉시 기요아키의 마음속 움직임을 이해했다. 계속 그의 친구이기 위해서는 거친 우정은 절제해야 한다는 것. 마구 칠해 놓은 벽에 무심코 손을 짚어 손자국을 남기는 일 따위는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경우에 따라서는 죽을 만큼 괴로운 친구의 고통까지 간과해야 한다는 것. 특히 그것이 숨김으로써 우아해질 수 있는 특별한 죽음의 고통이라면.


이럴 때 기요아키의 눈이 어딘지 절실한 간청을 내비치는 것을 혼다는 좋아하기까지 했다. 그 모호하고 아름다운 경계 지점에서 멈춰 달라, 애타게 바라는 눈길..... 차갑고 팽팽한 긴장 상태에서 우정을 흥정하는, 이토록 무정한 대치 속에서 비로소 기요아키는 청원인이 되고 혼다는 탐미적인 구경꾼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두 사람이 암묵적으로 바라 왔던 상태이자 사람들이 두 사람의 우정이라고 이름 붙인 것의 실체였다.


<미시마 유키오 ㅡ 봄눈(春の雪), 47 ~4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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