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사람은 여전히 볼 수 없고,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계속 봐야 하니 인생이 원래 그런 건지, 어긋남이 우리 삶이겠거니 하고 체념하게 된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지만 사랑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 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감정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없을까.
일본 다이쇼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의 이야기가 힌트가 될지 모르겠다. 류노스케는 언젠가 그와 문학적인 재능을 겨룰 수 있는 여자를 만난 적이 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글을 쓰는 작가였으니 그 여자 또한 글을 잘 쓰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이름은 가타야마 히로코. 아일랜드 문학 번역가이자 시인이었고, 그보다 열네 살 연상의 미망인이었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나자마자 운명처럼 서로에게 끌렸다. 류노스케는 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감정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고시(越)의 여인> 같은 서정시를 지으며 그녀에게 깊이 빠져들기 전에 그 감정에서 빠져나왔습니다."
바람에 휘날리는 모자가
어찌 길에 떨어지지 않으리
나의 이름은 아쉬울 것 없네
아쉬운 건 그대 이름뿐이니
'고시'는 지금의 호쿠리쿠 지역의 옛 지명이다. <고시의 여인>은 그곳에서 살던 히로코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였다. 그는 또 <어느 바보의 일생>에서 이렇게 토로한다. 그 감정에서 물러나오려 할 때의 마음이 마치 나무줄기에 얼어붙은 반짝이는 눈을 떼어내는 것 같은 애절함이었다고.
한마디로 무척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는 말이다. 류노스케는 그녀에게 더 깊이 빠져들기 전에 그 감정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가 택한 방법은 시를 쓰는 것이었다.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 유서에까지 이 일을 남긴 것을 보면 그는 분명 그녀를 사랑했던 것 같다. 헤어지면 더 이상 그녀의 이름을 부를 일이 없어진다고, 그게 아쉬울 뿐이라는 고백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는 사랑하는 감정에서 '빠져나왔다'고 말하지만, 시의 내용을 보면 꼭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시 한 편을 쓰는 것으로 연인에 대한 사랑의 감정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할까. 문학적인 재능이 특출난 류노스케 같은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헤어지면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의 이름은 익명이 된다. 마음속으로 되뇌일 수는 있어도 입으로 더 이상 그 이름을 부를 일은 없어지기 때문이다. 상대의 거부로 헤어졌다면 상처 때문에라도 빨리 잊으려 할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그 이름마저 기억 속에서 희미해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류노스케의 고백과 달리, 그가 그녀와 헤어질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마음을 이름에 빗대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는 그녀를 볼 수 없고 이제 마음속에 그녀의 이름만 남았으니, 그게 아쉽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잊어야 한다는 안타까움 앞에서는 말조차 부질없다.
류노스케의 고백과 달리 그는 그 감정을 완전히 지워 버린 것이 아니라 시 속에 남겨 두었다. 결국 사랑이라는 것은 완전히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남는다고 할 수 있다.
이름으로, 기억으로, 혹은 한 편의 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