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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ul 06. 2022

아니 만났어야

인연 / 건축학개론

어젯밤 우연히 들었던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 1994년에 발매되었으니 나온 지 벌써 오래된 곡이다. 이 곡을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햇수로 30년이 다 되어 가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2012년 개봉한 영화 <건축학개론>에도 등장하니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곡이다.


Oldies but Goodies라는 말도 있지만, 이 곡이 나온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아무래도 그 시절의 곡의 느낌을 그때를 살았던 나 같은 사람만큼 느끼는 건 한계가 있을 것 같다.


음악이란, 클래식을 빼놓고는 시대와 숨 쉬며 시대와 함께 명멸하는 법이니까. 영화 속 장면과 오버랩되면서 문득 피천득 선생의 에세이 <인연>이 떠올랐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선생은 연정을 품었던 아사코를 세 번째는 왜 만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을까? 나이가 들어 이제는 예전의 모습을 찾기 어려운 아사코의 현재의 모습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일까. 혹자는 처음 만났을 때 풋풋했던 모습을 잃어버린, 그래서 추억 속에만 간직했던 그녀의 그때 그 모습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실망한 나머지 그렇게 표현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약간 견해를 달리한다. '1번 만나는 것은 우연, 2번 만나는 것은 인연, 3번 만나는 것은 운명'이라는 말이 있다.


이미 헤어진 연인을 우연히라도 다시 만나는 것은 바닷가에서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두 번이나 만났다면 그건 우리가 모르는 어떤 연이 작용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세 번째는 여간해선 불가능하다. 만나려는 의지도 있어야 하지만, 의지를 뒷받침해 줄 상황도 맞아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선생 역시 아사코를 세 번째 만났을 때 그녀와의 만남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운명으로 얽혀버렸으니 이젠 헤어지려고 해도 헤어질 수 없는, 잊으려고 해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현실은 두 사람의 그런 만남을 수용하기 어려웠을 테고.


그러니 세 번째 만남 이후, 현실이란 장벽 앞에서 관계를 이어갈 수 없었을 테니 그럴 바엔 차라리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선생에게 물어본 적도 없고, 이와 관련된 해설을 본 적도 없으니 이건 순전히 내 주관적인 해석이다.


여전히 사랑하는데도 그 사람과 연락이 끊어지고 다시 만날 수 없다면, 그것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없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다면 고통도 없었으련만, 그냥 막연히 그리워만 하고 말았으련만. 어디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던가.


보고 싶은 사람을 그리워하며 산다는 것은 때로 행복하지만, 그 사람이 없는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견뎌야 한다는 점에서 매우 고통스럽다. 선생은 그리움이 고통으로 바뀌는 그 세 번째 만남을 역설적으로 차라리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표현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 것이다.


선생의 다른 글이나 '인연'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보면 그가 단지 아사코의 외적인 변화를 수용하지 못해 세 번째 만남을 후회했을 것 같지 않다.

"예전을 추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의 생애가 찬란하였다 하더라도 감추어둔 보물의 세목과 장소를 잊어버린 사람과 같다. 그리고 기계와 같이 하루하루를 살아온 사람은 그가 팔순을 살았다 하더라도 단명한 사람이다. 우리가 제한된 생리적 수명을 가지고 오래 살고 부유하게 사는 방법은 아름다운 인연을 많이 맺으며 나날이 적고 착한 일을 하며, 때로 살아온  자기 과거를  다시 사는 데 있는가 한다." <피천득 _ 인연, 80p>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은 지금 들어도 오래된 곡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매우 세련된 곡이다. 고급스러운 멜로디와 중간에 등장하는 트럼펫 솔로가 인상적이고, 저음과 고음을 오가는 김동률의 보컬과 배경음악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멋진 곡이다. 가사는 또 얼마나 마음을 흔들어 놓는지.


그런 이유로 나는 이 곡을 좋아하지만 같은 이유로 일부러 찾아서 듣지 않았다. 어제처럼 우연히라도 듣게 되는 날이면 지난 시간이 자꾸 떠올라 건너뛰곤 했는데, 어제는 그냥 다 듣고 말았다. 아니, 몇 번이나 반복해서.


아마 피천득 선생과 아사코의 ‘안타까운 인연'과 영화 속 주인공 승민과 서연의 ‘슬픈 인연'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간직한 추억때문일 수도 있고. 그런 날도 있는 것이다. 내 의지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천상병 _ 들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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