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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ul 21. 2022

아삽의 질문

시편 73 / 아삽의 시

얼마 전 북촌을 걸었다. 덥지만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한적한 길을 골랐다. 경복궁 돌담길과 청와대 앞길을 거쳐 가회동으로 난 길이었다. 북촌은 이름만큼 여름 풍경도 정겨운 곳이다. 


거리 풍경을 보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첫걸음은 대개는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 특히 최근에 겪었던 일,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문제들로 시작되었다. 

‘사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든 것일까?

'왜 나한테 이런 어려움과 고통이 있는 것일까?'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질문을 할수록 더 힘들어졌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한테 물어야 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걷는 내내 명확한 답을 찾지 못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인데,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악이 존재하고, 선한 사람들에게도 고난과 어려움은 피해가지 않는다. 특히 내가 자초하지 않은 일은, 왜 힘들어야 하는지 더 알 수 없었다. 


우리는 힘들 때,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왜 이런 일이? 도대체 왜 나에게?'라고 따진다.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다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건가?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산 선견자 아삽 또한 그 시대 악인들이 형통함을 보고 괴로워했다. 그들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겪는 고난도, 재앙도 없었다. 오히려 악인들은 신수가 더 편하고, 그들의 재산은 늘어만 갔다. 교만함이 극에 달했다. 그들의 위세에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절망은 깊어만 갔다. 


그는 하나님께 반문한다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죄를 짓지 않고 산 것이 허사라는 말입니까?" 여전한 하나님의 침묵. 오랜 시간,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기 전까지 던졌던 질문이었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악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시편 73, 아삽의 시>


아삽은 고통스러운 질문 끝에 하나님이 계신 성소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악인들이 잘 사는 것이 일시적임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결국 한낱 꿈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지리라는 것을. 깊은 기도 끝에 얻은 답이었다. 


중요한 건 아삽이 하나님께 끊임없이 물었다는 점이다. 그는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도 아삽과 같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질문과 싸워야 한다. 답을 얻고 안 얻고는 그다음 문제이다. 


그리고 이제부터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구하기 어려운 답을 찾기 위해 기도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더 큰 뜻을 위해 방향을 전환해 보는 거다.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다. 답은 역시 기도에 있었다.


받아들일 수 없는 그 기막힌 일들에 대해 '왜 저에게 이렇게 하셨느냐?'라고 묻기보다는 '제가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저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선하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질문을 바꿔야 한다. 


상황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상황을 대하는 자세, 무엇보다 일어난 일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는 내가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악인들에 대한 판단은 내 몫이 아닌 하나님이 하실 영역이다.




믿음이란 결국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같이 믿는 것, 내 생전에 그 결과를 확인하지 못하더라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나 모세와 같이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았다.


그 믿음만 있다면 내게 주어진 고통이나 고난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문제보다 더 큰 하나님을 신뢰하느냐 신뢰하지 못하느냐의 문제만 남는다.


새벽 미명이 가장 어두운 법이다. 빛은 어둠이 있기 때문에 빛이다. 빛은 어둠이 있어 더욱 빛난다. 고통과 슬픔이 있다고 빛을 찾아가는 여정을 중단할 수 없다. 누구도 옆에서 도와줄 수 없다. 내가 겪는 고난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개별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지나고 보니 고통과 슬픔 또한 내 인생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빛이 되었다. 고난은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극복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삶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맥스 루케이도의 조언 역시 다르지 않다. 그동안 외면했던 문제들에 대해 질문하고 조용히 귀 기울여야 한다. 마지막 걸음으로 의문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오늘 걷기를 잘한 것 같다. 

홀로 어둠의 뒷골목에서 

어쩔 수 없는 삶의 어려움을 만나면 

담요로 덮어버리거나 냉소로 무시하지 마세요. 


TV 소리를 키우지 말고 

그것들이 없는 것처럼 가장하지도 마세요. 


대신 가만히 멈춰 서서 고요히 귀 기울여 보세요. 

그동안 외면해왔던 것들에 대해. 



<맥스 루케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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