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평소 내리던 역에서 내리지 않고 안국역에서 내렸다. 뚜렷한 이유는 없고, 안국역에 내려서 북촌을 거쳐 집까지 걸어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기 때문이다.
늦은 밤이라서 그런지 지하철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금요일이니, 다들 어딘가에서 놀고 있나 보다 했다. 오늘따라 사람들이 없기는 거리도 매한가지였다. 한적하고 조용했다.
에어팟을 귀에 꼽고, 음악을 듣는데 첫 음악으로 이 곡이 나왔다. 아, 이 곡을 얼마 만에 다시 듣는 건지, 감회가 새로웠다. 이 곡을 들었을 때 추억도 떠오르고. 대학 시절, 공부하느라 지칠 때 많이 들었던 곡이었다.
내 추억은 그것이다. 밤 11시 30분 중앙도서관, 그때도 지금처럼 모두 집에 가고 몇 명 남지 않았다. 해도 해도 끝이 없던 공부. 시험은 얼마 남지 않아 부담감이 한껏 올라간 때였다. 수위 아저씨는 곧 도서관 문을 닫는다며 정리하라고 하고…
주섬주섬 보던 책을 책가방에 넣고, 집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 안에서 워크맨을 통해 들었던 곡이 바로 이 곡이었다. 피곤에 지쳐 지하철로 환승하기 전까지 버스 안에서 잠시 눈을 감아야 했다.
그때는 음악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딱히 스트레스를 해소할 만한 취미가 없었으니까. 특히 곡의 시작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곡들에 비하면 기교나 리듬감이 다소 다를 수 있다. 순전히 내 주관적인 느낌이지만, 촌스럽거나 리듬이 고풍스럽지 않다.
'자꾸 감상적이 되면 곤란한데, 나 오늘 또 이러고 있다!'하는 생각에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런 생각까지 미치자, 주변 풍경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나무들, 경복궁의 돌담, 한옥들...모두 세월을 잊은 듯 같은 곳에서 몇백 년을 버티고 있다. 우리는 짧은 삶을 살다 가지만, 그들은 아마 특별한 일이 없으면 지나온 세월만큼 더 견딜지도 모른다.
밤의 정기가 서린 고궁을 보면서 이 곡을 들으니 유한한 내 삶이 더 실감 나게 다가온다. 1984년 11월에 나온 곡이니 조금 있으면 40년이 다 되어 간다. 이 곡을 불렀던 Foreigner도 이젠 더 활동하지 않는다.
아, 40년이라니, 그러고 보니 이 곡을 처음 들은 건 대학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그 이후 자주 들어서 발매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이 느껴졌을 뿐. 이 곡을 들으면서 나는 세월의 무상함에 대해 생각했다.
얼마 전 읽은 미야모토 테루의 <금수>의 문장. 헤어진 아내가 전 남편을 우연히 만나 그에게 보낸 편지 형식의 소설이다.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아키, 그녀의 마음이 느껴져서 그런지 읽는 내내 그녀의 사연이 안타까웠다.
그런다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데... 그렇게 한때의 상처는 슬픔이 되어 어느 순간에 떠오르곤 한다. 그녀처럼 사랑했던 이의 영상이 사라지지 않도록 애써야 하겠지만.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마음속에 올라온 당신의 영상이 금방 사라질 것만 같아 저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으려고 고집스럽게 몸에 힘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 형태로 이혼할 수밖에 없게 되어 우리는 헤어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당신은 틀림없이 저와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도 문득 나를 떠올리며 어딘가 혼잡한 길을 걸을 때가 있지 않을까? 아직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미야모토 테루 _ 금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