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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Sep 09. 2022

돌이킬 수 없는 이야기

냉정과 열정 사이 / 준세이가 아오이에게 보내는 편지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2003년도에 개봉했으니 벌써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는 건 이런 순간이다. 그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일 때문에 정신없이 살았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이 영화를 놓친 건 지금이나 그때나 삶에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부분, 주인공 아가타 준세이가 아오이와의 첫 만남과 사랑했던 순간들을 회상하는 장면이다. 준세이는 아오이에게 쓴 편지를 통해 그녀와 지난날 함께 했던 추억을 이야기한다. 마지막 편지였으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었을 수도 있다. 뚜렷한 감정의 변화가 없는, 최대한 절제한 저음의 목소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지금의 상황을 수용하려고 애쓰는 것으로 느껴져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이국에서 다시 만난 아오이, 그녀는 준세이에게 말한다. 자신은 다 잊었다고. 새로 만난 남자와 지금 행복하다고. 그녀의 차가운 말 앞에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그 순간 준세이의 눈빛은 참으로 쓸쓸했다.


이 연인들의 가슴 아픈 사연이 남의 일 같지 않아서 더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준세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사람이라면 그가 마지막 편지에 쓰지 못한, 정말 하고 싶었지만 차마 할 수 없었던 이야기까지도 읽을 수 있었으리라.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게 그때 감정이다. 살다 보면 표현하지 못하고 마음에 묻어두어야 할 말도 있다.

준세이가 독백을 하거나 아오이에게 보낸 편지를 narration하는 장면에서 준세이 역을 맡은 다케노우치 유타카의 목소리, 아름다운 영화 속 음악까지 더해져 같은 남자가 들어도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약간 톤이 높은 일본어가 사람에 따라서는, 때에 따라서는 이렇게 멋지게 표현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이 영화를 보고 깨달았다.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일본어 열풍이 불었다고 하는데 헛소문이 아닌 듯싶었다.


목소리도 목소리지만, 어쩌면 배역 자체에서 나오는 분위기와 아우라(aura)의 힘도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지난 시절, 사랑했던 연인에 대한 애틋함과 아쉬움이 목소리에 그대로 담겼기 때문이다. 다케노우치 유타카는 감성 어린 연기로 준세이의 감정을 제대로 복원해 냈다.


영화 중반, 준세이가 아오이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가 그의 목소리를 통해 잔잔히 흐른다. 지난 시절의 기억을 추억하는 것, 그건 때로 살아갈 힘이 되기도 한다. 요시모토 바나나도 <바나나 키친>에서 이렇게 썼다.


“여러 겹으로 덧칠된 추억은 좀처럼 투명해지지 않는다. 끈끈하고 무거운 액체로, 인생의 앙금으로 가라앉는다. 시간이 흐르면 시큼하게 삭아, 애처롭게 발목을 잡는다. 그래도 역시 추억은 있는 편이 좋다. 애처로우면 애처로울수록 우리들 발자국에 깊이가 생긴다.”

[준세이가 아오이에게 보낸 편지]


아오이(あおい),


갑자기 편지 보내는 거 용서해 주길 바래.

그리고 아마 이 편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내는

아주 긴 편지가 될 거라는 것도.


나는 지금, 우메가오카의 아파트에 있어.

피렌체에서 도망쳐 나와 일본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어.

오늘 오랜만에 시모기타에 갔다 왔어.

너를 처음 만났던 곳이지.


그 거리, 그 가게에서 우리는 스쳐 지나갔지.

말도 나누지 않은 한순간의 스쳐 지나갔던 일을

나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

너는 의아해했지만 나는 그 미술관에

이전부터 자주 갔기 때문에 그곳 안내창구에

새로운 여자애가 온 것도 알고 있었고,

그녀가 아르바이트생이라는 것도,

과는 달라도 같은 대학에 다니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그 애는 항상 혼자라는 것까지 알고 있었어.


혼자 있는 걸 냉정하게 견뎌내는 여자,

나는 널 무척이나 강한 애라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어.

외로워서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지만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강해서

너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던 거지.


우리는 그때 둘 다 스무 살이었고, 너무 어렸어.

그때는 왜 그렇게 두근거렸는지...


처음으로 걸려온 네 전화. 첫 데이트의 약속.

우리가 만나기로 했던 커피숍. 처음으로 함께 본 영화.

나는 마음에 드는 음악과 책이 있으면

누구보다도 먼저 너에게 알려줬지.

우리들은 많은 얘길 나눴어.


특히 너의 어린 시절 이야기.

네 아버지가 일본인이라

네가 아오이라는 일본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것.

사고로 그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가 재혼하자 상대 가족과 살게 되었고

넌 아무리 해도 새 가정에 정을 붙이지 못했다는 것.

줄곧 고독했었다는 것.

아버지의 나라를 알고 싶어서 유학을 결심했다는 것.


너는 자신이 머물 곳을 찾고 있다고 했지.

처음으로 네가 내 방에 들렸던 그날 밤,

난 밤새 네 생각을 하느라 잠을 이룰 수 없었어.


너와 함께 보낸 우리들의 추억은

변하지 않고 영원할 줄 알았어.

하지만 자주 가던 커피숍은 지금은 철거되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더군.

그 중고 레코드 가게도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고

그 거리에는 이젠 아무것도 없어.


기억나? 우리들이 좋아하던 장소,

그리고 대학 기념 강당 옆 콘크리트 계단에서

첼로를 연주하던 학생 말이야.

항상 같은 곡을 연주했고 늘 같은 데서 막혔던,

그 학생의 서툰 첼로 연주에 우리는 웃곤 했지.


첫 키스를 나눈 장소에서 들었던 그 곡.

아오이, 난 이제 그 곡을 기억하지 못해.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이야기.

그래... 이젠 다 지나간 과거일 뿐이야.

끝까지 읽어줘서 고마워.


밀라노까지 너를 만나러 갔을 때, 점잖지 못한 나 자신을,

지금은 몹시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어.

용서하길 바래.

함께 살고 있는 남자 친구에게도 안부 전해 주고,

건강하게  잘 지내.


어쨌든 네가 행복하다니 다행이야.

멀리 밀라노의 아오이에게...


이제는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준세이가(順正より)

아오이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준세이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다. 첼리스트에게 그 시절 준세이와 함께 들었던 첼로 곡을 연주해 달라고 부탁하고. 준세이의 편지를 읽고 그에게 전화를 하지만 차마 자기가 아오이라고 밝히지 못한 채 전화를 끊기도 하고. 준세이를 잊었다고 하나,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준세이는 아는 사람이 없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고 사랑해 주었던 유일한 남자였으니까. 아무리 현실이 냉정하다고 해도, 첫사랑의 열정은 그녀 가슴속에 깊이 남아 있었다. 에쿠니 가오리 또한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에서 아오이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녀 역시 준세이를 '아무런 분별없이' 사랑했다고. 진정한 사랑이 희귀한 시대, 이 영화는 사랑이 무엇인지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해 준다.


"나는 준세이의 얘기를 듣는 게 좋았다. 강변길에서, 기념 강당 앞 돌계단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도중에 있는 찻집에서, 우리들의 방에서. 준세이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누구에게든, 당황하리만큼 열정을 기울여 얘기했다. 항상 상대방을 이해시키려 했고, 그 이상으로 이해받고 싶어 했다. 그리고, 얘기를 너무 많이 했다 싶으면 갑자기 입을 꾹 다물어버리곤 했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다는 듯, 그리고 느닷없이 나를 꼭 껴안곤 했다. 나는 준세이를, 헤어진 쌍둥이를 사랑하듯 사랑했다. 아무런 분별없이."


'사람의 있을 곳이란, 누군가의 가슴속밖에 없는 것이란다.' 누군가의 가슴속. 비 냄새나는 싸늘한 공기를 들이켜며, 나는 생각한다. 나는 누구의 가슴속에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내 가슴속에는 누가 있는 것일까. 준세이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준세이를 만나 이야기하고 싶었다. 다만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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