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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Oct 07. 2022

당신은 삶에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존 윌리엄스 / 스토너

"셰익스피어가 30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네.

스토너 군, 그의 목소리가 들리나?

셰익스피어가 자네에게 뭐라고 하고 있나?"




부모의 뜻에 따라 농사를 짓기 위해 농과대학에 진학한 남자, 필수과목인 영문학 수업을 위해 읽었던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한 편과 교수의 이 질문이 그의 삶을 바꾼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과정이 그의 삶이었다.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의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의 이야기이다.


그는 불의한 세상과 그릇된 사람들의 행태에 무심했던, 그러나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면서 소신과 위엄을 끝까지 잃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제3자의 시선으로 자신의 삶을 관조했던 아니 관조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이야기를 읽으며 전쟁과 불화의 시대를 겪었던 그가 자신을 지키는 불가피한 선택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만 보면 스토너 교수의 삶은 평범하다. 어려운 가정에서 자랐지만 교수가 되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일을 겪었다. 대학교수가 되는 과정, 배우자인 이디스 보스트윅과의 만남과 결혼 그러나 불행한 결혼생활, 학생 찰스 워커와의 갈등 그리고 그의 지도 교수 로맥스와의 불화, 대학 강사 캐서린 드리스콜과의 사랑 그리고 이별, 딸의 일탈 등등. 어떻게 보면 주변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이다.


소설에서는 전쟁과 이에 대한 스토너의 생각 등이 언급되지만 주된 화제가 아니다. 소설의 핵심은 스토너가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들에 어떤 반응을 보였고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즉 삶의 방향성에 있다. 그는 자신의 소신을 지키다가 원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해도 저항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인다.


이디스와의 독특한 성격과 이에 따른 불화로 힘든 결혼생활이었지만 이혼을 하거나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만의 방식으로 이디스를 존중하고 보살피며 자신의 생활을 담담히 이어간다. 심지어 바쁜 강의 시간과 연구활동에도 불구하고 딸 그레이스의 양육을 도맡기까지 했다. 그 과정에서 이디스에게 한 마디 불평을 한 적도 없다.


그는 학생 찰스 워커에게 학점을 주는 문제로 동료 교수인 로맥스와 관계가 틀어지지만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에는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로맥스의 복수로 불이익을 입어도 절망하지 않고 왜 그렇게 하느냐고 따지지 않았다. 분명히 자신의 의견을 밝힐 수 있는데도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처럼 그냥 참고 넘기는 그의 모습에서 내가 그 입장이라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는 법이죠. 세월이 흐르면 다 잘 풀릴 겁니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에요."


물론 스토너가 삶이 주는 어려움이나 곤경을 항상 수긍했던 것만은 아니다. 다만 직접적으로 부딪히지 않고 부드럽게 우회로를 찾았다. 로맥스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것에 대한 보복으로 그에게 신참 교수가 맡는 1학년 신입생 강의를 맡긴다. 그는 반발하지 않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군말 없이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교과서가 아닌 고전에서 차용한 새로운 시각으로 작문을 하는 방법을 강의했던 것.


성적에 예민한 학생들의 항의가 이어지고 로맥스는 학장에게 그의 징계를 요구하지만, 종신교수의 강의에 간섭할 수 없는 불문율 때문에 결국 스토너에게 원래 그가 맡았던 상급생들과 대학원생들의 강의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스토너는 로맥스를 직접 상대하지도, 억울하다고 항의하지 않고도 자신의 뜻을 관철했던 것이다. 불합리와 불의에 대응하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아내와의 불화, 동료 교수와의 갈등, 문제 학생의 도전,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발생한 일들이다. 그들과 싸워서 이기기를 바랐지만 그는 끝내 그런 기대를 외면한다. 자기 일인데도 남의 일처럼 세상과 주변을 바라보는 것, 세상 이치에 달관하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였다. 그는 그렇게 자신에게 닥친 불운을 견뎠다.


나는 그의 삶이 궁극적으로 실패했다고 단정하지 못하겠다.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실패인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성공인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렇지 않은 삶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좀 더 편해지고 유명해지고 대접을 받고 평온한 일상을 사는 것, 그게 성공이라면 분명히 그는 실패했다.


그러나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그 일을 사랑하며 그 과정에서 의미를 찾았다면 비록 세상 기준으로 실패하고 불편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실패했다고 말할 수 없다.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차치하고, 과연 성공한 삶이나 그렇지 않은 삶이나 마지막 순간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모든 것이 망각되고 말 텐데.


여러 일들로 혼란스러운 요즘, 나는 스토너의 삶을 돌아본다. 그처럼 중요하지 않은 일에 연연하지 않고, 내가 애정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보는 것, 어떤 성과가 없더라도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것만이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내적인 평안을 이룰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주목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비결이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나이가 많아서 이상해 보이는 학생들은 열렬하고 진지했으며 시시한 것들을 경멸했다. 유행이나 관습에 무지한 그들이 공부를 대하는 태도는 스토너가 예전에 꿈꾸던 학생의 모습 그대로였다. 공부를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로 생각하는 모습."


그는 죽음을 앞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너는 삶에 무엇을 기대했나?" 돌아보면 실망스럽고 어리숙하기만 했던 지난 시절, 스토너와 마찬가지로 나는 이 질문 앞에서 실망만 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정말 내 삶에 무엇을 기대했나? 사랑을, 성공을, 명예를... 죽음을 앞둔 그에게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처럼 나도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삶에 기대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고 너무 실망할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매 순간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적이었던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 가지가 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

스토너는 자신의 일, 즉 진리 탐구에 열정적이었고 그 일 자체를 사랑했다. 죽음이 서서히 다가오는 마지막 순간, 그는 자신이 아꼈던 그러나 오랫동안 손도 대지 못했던 책들의 책장을 넘기며 예전의 설렘이 그를 사로잡기를 고대했다. 그는 책을 품에 안고 영원한 침묵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학자로서 교수로서 자신의 삶에 충실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 불완전한 인간이니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할 수 없다. 한편 완벽할 수 있다고 해도 그 완전함 때문에 불완전해질 수도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마지막 순간이 되면 나에게는 무엇이 남을까? 나는 삶에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가? 그가 죽음의 순간 물었던 이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을 가리켜 실패한 인생이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그 말은 곧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해서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남들과 같은 인생을 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최은영 작가는 말한다. 나조차 내 마음을 알 수 없을 때 누군가의 깊은 내면을 따라가 보는 일은 특별한 위로를 준다고. 스토너의 내면을 따라가면서 나는 많은 위로를 받았다.


얀 마텔(Yann Martel)은 말한다. 소설이란 현실을 취해서 변화시키는 것. 비틀어 그 정수를 끄집어내는 것이라고. '나의 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답을 찾기 어려운 이 추상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스토너는 그의 삶으로 보여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John Williams는 모순되고 불의한 현실을 비틀어 삶의 정수를 끄집어내는 데 성공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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