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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Sep 21. 2022

해 질 녘, 나는 끝내 지고 마는 거야

지난 주말, 절기상으로는 가을인데도 여전히 더웠다. 9월 중순에 한낮 온도가 31도라니, 거기다가 습도까지 높아 왜 그렇게 후덥지근하던지, 오전에 산에 갔다 와서 기운마저 없었다. 뭘 해도 의욕이 생기지 않는 날, 그런 때도 있는 거라고 그냥 넘기기엔 마음 한구석이 뭔가 찜찜했다. 그게 무얼까 고민하다가 어느덧 저녁이 다 되어갈 무렵, 한강으로 향했다.

무슨 행사를 하는지 반포대교 주변은 사람들로 인산인해, 곳곳에서 공연하는 소리에 가판에서 파는 음식 냄새까지 더해져서, 아마 친구가 부르지 않았다면 나는 이 더운 날씨에 한강에 가지 않았을 거다. 그때였다. 답답한 마음에 눈을 들어보니 저 멀리 강 건너편에서 해가 지고 있었다.


저 해 때문에 하루 종일 더웠는데, 마치 그게 다가 아니라는 듯 태양은 아름다운 빛으로 주변을 물들이고 뉘엿뉘엿 산기슭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건 곧 사라지기 때문이다. 오늘의 노을이 내일의 노을일 수 없다. 사라지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그 찰나의 풍경을 마음에 담아두기 위해선 일부러라도 내 시선을 그곳으로 향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 시선을 옮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본다고 해도 감동을 느끼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지...양귀자 작가의 소설 <모순>에 이런 글(슬픈 일몰의 아버지)이 나온다.




"해 질 녘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 돼. 그러다 하늘이 저편부터 푸른색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거든. 가슴만 아픈 게 아냐.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몰라.


환한 낮이 가고 어두운 밤이 오는 그 중간 시간에 하늘을 떠도는 쌉싸름한 냄새를 혹시 맡아본 적 있니?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 시간, 주위는 푸른 어둠에 물들고, 쌉싸름한 집 냄새는 어디선가 풍겨 오고, 그러면 그만 견딜 수 없을 만큼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거기가 어디든 달리고 달려서 마구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나는 끝내 지고 마는 거야...."




점점 사라지는 저녁노을을 보고 있으니 가출한 주인공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연이 있어 집을 나갈 수밖에 없었지만 그도 해질 녘에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거다.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리움이 밀려오고, 나라는 존재를 따뜻하게 받아줄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리라.


바로 이 순간 그나 나나 별 차이가 없었다. 오전에 나를 찜찜하게 했던 그 무언가는 어쩌면 그리움이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는지, 저 노을을 보면서 한참을 생각했다.


한 권의 소설이 그리고 흔한 풍경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한다. 너무 아름다워서 처연해지기까지 한순간, 앞으로 이런 풍경을 얼마나 더 볼 수 있을까. 볼 수 있다고 해도 지금 이 느낌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나는 선뜻 장담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은 한순간에 불과하다고, 그래서 그 어떤 것도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고, 그러나 그리워할 대상이 있는 것만으로도 그동안 충분하다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생각했다. 허수경 시인의 시 <레몬>의 한 구절처럼 그렇게 여름의 마지막 한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당신과 나의 계절이 여름이었던 때 '우리의 현재는 나비처럼 충분했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곧 사라질 만큼 아름다웠지만,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는 모든 세상을 속일 수 있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해 후회만 쌓이고 말았다.

저 여름이 손바닥처럼 구겨지며 몰락해갈 때

아, 당신이 먼 풀의 영혼처럼 보인다

빛의 휘파람이 내 눈썹을 스쳐서 나는 아리다


이제 의심은 아무 소용이 없다

당신의 어깨가 나에게 기대 오는 밤이면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는 모든 세상을 속일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 온 여름에 다시 생각해 보니

나는 수줍어서 그 어깨를 안아준 적이 없었다


후회한다


<허수경 _ 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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