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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Oct 11. 2022

슬픔과 고통을 음악에 실어

나는 클래식(Classical Music)이라고 칭하는 고전 음악을 오래전부터 들었고, 지금도 자주 듣는 편이지만, 그렇게 잘 알지는 못한다. 정보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데다가, 듣기 편한 곡 위주로 그마저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다고 공감하는 곡들을 주로 들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상황에 따라 듣는 음악이 달랐다. 일을 할 때나 책을 읽을 때와 같이 뭔가 집중이 필요할 때 주로 들었던 음악이 클래식이다. 고등학생일 때부터 계속된 오랜 습관이다. 특히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무반주 첼로 조곡’처럼 단조로운 선율이 반복되는 바로크 풍의 음악을 선호한다. 요즘은 가끔 재즈를 듣기도 한다. 


반면에 산책 또는 조깅을 할 때는 팝(pop) 위주의 다소 리듬감이 풍부한 음악을 듣는다. 뭔가 역동적인 분위기에 내 몸을 싣기 위함이다. 그리고 조용히 생각에 잠기거나 묵상을 할 때, 즉 이른 아침 시간이나 자기 직전에는 Hymn이라고 분류되는 종교 음악을 듣는다. 가끔 그레고리안 성가(Gregorian Chant)를 듣기도 한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클래식만큼 영원한 것도 없는 것 같다. 반복해서 들어도 질리지 않고, 들을 때마다 매번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무리 읽어도 새로 읽는 것과 비슷한 성경을 닮았다. 그래서 클래식인지도 모르겠지만. 

성큼 다가온 가을, 아름다운 자연에 어울리는 클래식 명곡을 찾아서 듣는 것도 이 계절을 제대로 사는 비결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만든 것 중에 영원한 것은 없지만, 세월을 건너뛰어 살아남는 곡들도 분명히 있다. 인간이 온갖 시련과 어려움을 통해 강해지는 것처럼 음악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렇게 세월을 견딘 음악을 들으며 내가 안고 살아야만 했던 고통과 상처를 음악에 실어 보냈다. 힘들었던 시절, 음악은 나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어떤 날은 하루의 대부분을 음악만 들은 적도 있으니, 지금도 그렇지만, 음악은 내게 쓸쓸할 때 함께해 준 친구였고 오랜 연인이었던 셈이다. 여기에 올린 음악들이 대개 그런 내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세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과 치유의 방법을 음악을 통해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비발디(Antonio Vivaldi)의 'Nulla in mundo pax sincera'가 대표적이다. 고통 없이 참 평안이 없다는 삶의 진리를 이 곡을 듣고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그의 에세이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상처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때마다 거기에 뭔가 특별한 음악이 있었다. 나는 그걸 무심히 집어 들어 보이지 않는 옷으로 몸에 걸쳤다. 사람은 때로 안고 있는 슬픔과 고통을 음악에 실어 그것의 무게로 제 자신이 낱낱이 흩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음악에는 그런 실용적인 기능이 있다. 


소설도 역시 같은 기능이 있다. 마음속 고통이나 슬픔은 개인적이고 고립된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더욱 깊은 곳에서 누군가와 서로 공유할 수도 있고, 공통의 넓은 풍경 속에 슬며시 끼어 넣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소설은 가르쳐준다. 내가 쓴 글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그런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기 전에 읽어야 할 책들이 있듯, '죽기 전에 반드시 들어야 할 명곡'들이 있다. 음악을 들으면 내 삶이 또 한 번 풍요로워질 수 있다. 하루키의 말대로 상처가 치유될 수도 있고. 클래식을 들으면서 곡 제목부터 어려울 때가 많았다.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고 대충 감으로, 아니면 들어보고 느낌으로 선별해서 듣다 보니 체계가 없었던 거다. 


마침 신문에 클래식 곡명을 구분하는 방법을 소개한 기사가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아래는 한국경제신문 5/23자 문화면에 실린 신연수 기자가 쓴 ‘수수께끼 같은 클래식 곡명…'작·음·곡·조·작'만 기억하세요’를 정리한 글이다. 말미의 하루키의 글은 왜 우리가 음악을 들어야 하는지, 끊임없는 가치 판단의 축적이 쌓여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평소의 내 지론과 일치하여 인용하였다.

<베토벤 Symphony No.5 in C minor, Op.67>


클래식 연주회장에서 받은 프로그램북을 펼쳐볼 때마다 드는 생각. ‘이런 암호문을 이해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날 연주할 곡명인 건 알겠는데, 작곡가 이름을 빼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암호처럼 복잡한 클래식 곡 제목, 어떻게 읽어야 할까.


기본 원칙만 기억해두면 생각보다 쉽게 암호를 풀 수 있다. 보통 클래식 곡 제목은 ‘작곡가 이름-음악 형식-곡의 순서-조성-작품 번호’ 순으로 짓는다. 작곡가 이름은 베토벤, 모차르트, 브람스 등 사람 이름이라 쉽게 알 수 있다.


음악 형식은 다양하다. 심포니(symphony)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위한 교향곡을 말한다. 소나타(sonata)는 여러 악장으로 구성된 기악곡, 콘체르토(concerto)는 독주가 가능한 악기와 오케스트라가 함께 연주하는 협주곡 형식이다. 이 밖에 오페라(opera), 레퀴엠(requiem ·장송곡), 스위트(suite ·모음곡) 등 다양한 형식이 있다. 그 뒤에 붙은 ‘No.’는 해당 형식 중 몇 번째 작품인지를 나타낸다.


그다음은 조성과 작품 번호다. 메이저(major)는 밝은 느낌의 장조, 마이너(minor)는 어두운 느낌의 단조다. ‘Op.’(라틴어 opus)는 작곡가의 몇 번째 곡인지를 나타내는 번호다. ‘No.’는 해당 작곡가가 이런 형식으로 작곡한 몇 번째 작품인지를, ‘Op.’는 해당 작곡가가 만든 모든 곡 가운데 몇 번째인지를 나타낸다. 그러니 Op. 숫자가 No. 숫자보다 크다.


통상 이런 번호는 작곡가가 죽은 뒤 곡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역사가나 후배 음악가들이 매긴다. 작곡 순서나 악보 출판 순서에 따라 붙인다. 간혹 작곡가의 이름이나 분류한 사람의 이니셜을 가져와 ‘BWV’(바흐) ‘K’(모차르트) ‘D’(슈베르트) 등 별도의 작품 번호를 붙이기도 한다.


정리하면 ‘베토벤 Symphony No.5 in C minor, Op.67’는 ‘베토벤이 작곡한 다섯 번째 교향곡이자 전체 통틀어 67번째 작품으로 어두운 느낌의 C단조 곡’이란 의미다. 하지만 실제 이 곡을 이렇게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들 ‘운명교향곡’이라고 부른다. 베토벤이 직접 붙인 제목은 아니다. 


그가 죽은 뒤 비서였던 안톤 쉰들러가 전한 ‘카더라~’ 통신에서 유래했다. 베토벤이 생전에 이 곡의 1악장 첫머리를 가리켜 “운명은 이와 같이 문을 두드린다”고 말했다나. 하이든의 ‘놀람교향곡’, 쇼팽의 ‘흑건’ 등도 모두 작곡가가 아니라 악보업자나 후세 사람들이 기억하기 쉽게 붙인 부제나 별명이다. 옛 클래식 작곡가들은 곡 제목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음악 그 자체란 이유에서다. 그렇다. 곡 이름을 외우지 못한다고 아름다운 선율을 못 느낄 리 없을 테니.

"나에게 음악이 가진 최대의 훌륭함은 무엇일까? 그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차이를 확실히 구분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큰 차이도 알고 중간 정도 차이도 알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미묘한 작은 차이도 식별할 수 있죠. 물론 그것은 나한테 좋은 것, 나한테 나쁜 것이라는 뜻이니 그저 개인적인 기준에 불과할 뿐이지만, 그 차이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인생의 질이라고 할 만한 것까지 크게 달라지게 만드니까요.


임없는 가치 판단의 축적이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갑니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그림일 수도 있고 와인일 수도 있고 요리일 수도 있지만 내 경우는 음악입니다. 그런 만큼 정말로 좋은 음악을 만났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_ 여백이 있는 음악은 싫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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