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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Dec 01. 2022

어차피

최진영 /구의 증명

힘들고 지친 날, 우연히 책에서 본 이야기나 짧은 문장이 위로가 될 때가 있다. 특히 내 마음을 꼭 집어낸 문장을 만나면 '어떻게 내 마음과 이렇게 같을까?' 하는 감탄부터 '나는 왜 이런 글을 쓸 수 없을까' 하는 자괴감까지 여러 생각이 들곤 한다. 나는 작가가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겠지 하고 말지만, 심정을 글로 잘 표현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운 건 사실이다. 


글이라는 것은 묘해서 내면의 생각이나 감정을 글로 표현하는 순간 나 자신을 다른 시선으로 객관화해서 보게 하는 힘이 있다. 일기를 쓰는 것도 그런 이유이리라. 문장력이 있고 없고, 적확한 단어를 선택하고 못하고는 다음 문제, 얼마나 진솔하고 진지하게 내 마음을 글로 담아낼 수 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사람마다 마음을 추스르는 방법은 다양하다. 밖에 나가서 운동을 하거나 사람들을 만나거나 아니면 글을 쓰거나, 각양각색이다. 나는 책에서 발견한 문장과 이야기로 마음을 추스르기도 한다. 내가 한 경험을 누군가도 이미 했을 테니, 그 경험으로 나를 돌아보면 정리가 안 되는 문제가 별로 없었던 거다. 


무엇보다 나 혼자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면 내가 하는 고민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며칠 전 읽었던 최진영 작가의 소설 <구의 증명>에 나오는 다음 구절이 그랬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생각하며 걸으니 

내 발은 당연하게도 구의 집으로 향했다.

구의 집 앞에 서서 녹슨 철문을 골똘히 쳐다보았다.

집 안에선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기다릴까. 기다리다 만나면 뭐라 말할까.

잘 지냈냐고 물어볼까. 

너 때문에 나는 만사가 시시해졌는데 

너는 사는 게 어떠냐고 물어볼까. 

이 생각 저 생각을 엮으며 마음속으로 구를 계속 불렀다. 


하지만 집 안도 골목도 잠잠했다. 

구는 내 생각을 하지 않는가 보다.

어쩐지 그런 확신이 들었다. 

우리가 특별한 사이라면 내가 이렇게 구를 부르는데 

구가 모를 리 없지 않나.

지금 보지 못하면 다음에 보면 되지,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나 통하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 이 순간만 산다면? 그래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그때는 주인공처럼 보고 싶은 이를 찾아 나서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이 지나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은 가장 늦은 시간이면서 가장 빠른 시간이기도 하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격언은, 시험공부를 할 때 종종 들었던 말이지만(그것도 위로랍시고), 인간관계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원하는 대로 된다는 보장은 없다. 관계는 상대가 있는 거고 그 말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아무리 내가 간절해도 상대방이 원하지 않으면 그 간절함은 때로 나를 비참하게 하거나 더 위축시키기도 한다. 그러니 그럴만한 사람에게만 그래야 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나이가 드니 쉽지 않았다. 세월은 우리에게서 시간뿐만 아니라 의지와 노력마저도 빼앗아 갔다. 덧없다는 것, 어차피 그래 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조금씩 경험하면서 삶의 무상함만을 곱씹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기대 끝에 확인한 냉정한 현실, 실낱같은 희망은 실망으로 끝나고 초조하고 조바심 났던 마음은 이제 다 풀어져 침대 위에 널브러지듯, 사라지고 말았다.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그래 봤자 소용이 없다는 생각까지 이르면 어느 순간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곤 한다. 화가 난다는 건 여전히 그 사람에 대한 미련과 기대가 있다는 것, 이마저도 사라지면 그야말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의 세상을 알 수 없듯, 꿈도 꾸지 않고 곤히 잠들었을 때 아무 의식이 없는 것처럼 모든 것은 망각에 묻히고 만다.


그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삶에 대해 냉소적이 되는 건 시간문제. 어차피 안 되는 거였으니 해서 뭐해, 어차피 이래도 별 소용이 없을 텐데, 어차피 그렇게 해도 결국 끝나고 말 텐데, 문제는 그 ‘어차피’였다. 삶은 이 ‘어차피’라는 자기 체념에 빠진 자신과의 싸움이다. 감사는 감사할 일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생의 관점이고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그 ‘관점과 시선’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를 이겨낼 수 있는 것 역시 그 ‘관점’의 회복이었다. 


그런데 요즘 나는 이 싸움에서 자꾸 지고 있다. 관점과 시선을 놓쳐버렸고 쉽게 회복이 되지 않았다. 하물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조차도 '어차피'라는 말을 되뇌고 있으니, 무엇보다 불만과 원망만 늘었으니 나는 이런 현실과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다시 한번 부끄럽고 씁쓸해졌다. 벌써 올해도 한 달 밖에 남지 않았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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