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조커, 2019
벌써 몇 년 전, 오랜만에 예전에 근무했던 검사들과 영화 <조커, 2019>를 본 적이 있다. 조커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를 이미 읽었기 때문에 꼭 보고 싶었던 영화다. 폭력을 미화했다, 잔인하다는 등의 숱한 논란을 낳았던 영화. 원래 좋은 영화는 논쟁적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압도적이었다. 주연인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자기애적 망상장애라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주인공을 연기한 그는 영화에서 정말 정신질환이 있는 것 같았다. 웃음이 한번 터지면 멈출 수 없는 남자, 그래서 정신질환으로 웃음을 멈출 수 없다고 적힌 명함을 가지고 다니던 남자, 그가 이 영화의 주인공 조커다.
물론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정신질환자들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우리 현실에서 그들이 주인공인 영화는 드물기도 하지만, 영화가 전반적으로 어둡기 때문이다. 나 역시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정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 아닌 주인공이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고, TV에 나와 자신을 비웃던 프로그램 진행자에게 총기를 난사하는 장면, 주인공에게 권총을 주고 이 사건의 발단을 제공했던 동료를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 등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영화가 빛이 난 건, 호아킨 피닉스의 매력적인 연기와 탄탄한 시나리오 덕분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내가 주목한 건 주인공 아서 플랙의 내면이다. 한번 웃으면 웃음을 멈출 수 없고, 늘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고 고백하는 그에게서 이상하게 동병상련이 느껴졌다. 나도 늘 부정적인 면이 강하기 때문에 그런 걸까.
사회로부터의 격리, 그리고 외로움 등이 맞물려 영화 속 장면 하나하나가 아서만의 일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친구도 별로 없다. 직장동료가 있지만 친하다고 할 수 없고, 딱히 사귀는 여자 친구도 없다. 허름한 아파트에서 어머니와 함께 사는 그는 그렇게 세상에 고립된 채 적대적이 되어 갔다. 아무도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을 상담하는 상담사까지도. 그는 말한다.
“당신은 내 말을 귀담아듣고 있지 않는군요.
매주 똑같은 질문만 하죠.
일은 어땠는지,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는 않는지...
지금 내 머리는 온통 부정적인 생각들로
가득 차 있는데.”
그가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에게 적대적이었다. 그는 코미디언이 되고자 했으나 그의 연기는 전혀 웃기지 않았고, 주목을 받지 못했다. 재능이 없어서라기보다 그의 하소연대로 그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려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상황이 그의 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선동의 원인을 제공했다며 그를 단죄할 수 있을까. 그는 말한다. 왜 모든 사람들이 무례하냐고. 맞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례하고 예의가 없다. 문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거다.
그는 다시 말한다. 왜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느냐고, 그것도 맞다. 우린 다른 사람, 특히 아서와 같이 약자에게 관심이 없다. 관심과 따뜻한 배려 없이는 한 사람의 인격이 얼마든지 파탄날 수 있음을 영화는 잘 보여준다. 하여, 조커는 우리가 만든 인물이지 그 스스로 만든 형상이 아니다. 우리 또한 얼마든지 조커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배려는 다른 것이 아니다.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얘기도 귀담아 들어주는 것이다. 굳이 내 의견을 섞을 필요도 없다. 듣다 보면 풀리게 마련이니까. 어렵긴 하다. 때로 지루하고. 그래서 누군가를 배려한다는 것은 그런 나를 인내하는 것과 다름없다. 영화는 그런 나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우연히 얻게 된 총으로 살인을 하게 되고, 급기야 자신을 놀림감으로 삼았던 사람들을 차례차례 죽인다. 선뜻 동의할 수 없는 방식이다. 중요한 건, 그가 택한 방법이 아니라 왜 그런 잔인한 살인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다. 동기나 과정을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 영화는 당신을 한없이 불편하게 하고, 짜증 나게 할 수도 있다.
영화를 보면서 아서 플랙의 고통에 대해 연민이 느껴졌다. 제대로 먹지도 못해 피골이 상접한 그의 모습, 뭔가 해보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는 현실. 그는 부정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흔히 조커는 악당이고, 배트맨은 영웅으로 알고 있다. 영화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해지긴 했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맞는 말이다. 눈여겨봐야 할 건 그렇게 된 과정이자 동기다.
영화는 호아킨 피닉스가 아니고선 완성될 수 없었다. 사실 조커라는 캐릭터가 그에게 어울릴지 의문이 들었지만, 기우였다. 그는 영화 속 조커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아니, 재해석했다고 할 수 있다. 삐쩍 마른 몸, 헝클어진 머리, 초점 없는 시선으로 그가 세상과 왜 등지게 되었는지 정확히 보여준다.
그는 세상과 끊임없이 화해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세상을 버리는 쪽으로 갔다. 아니, 세상이 그를 버렸고, 그의 노력을 외면했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너무나 매력적인 그의 연기는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위태롭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원래 아름다운 건 모두 위태롭지 않던가.
영화 후기라고 할 수도 없는 글을 썼다. 사실 영화를 본지 시간이 꽤 흘러 진작 썼어야 했는데 생각대로 잘 써지지 않았다. 필력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다른 영화와 달리 내 안에서 뭔가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미룰 수 없으니 이 정도로 쓸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