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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Dec 23. 2022

침잠(沈潛)의 시간

2014년 여름, ’피정(避靜)'이라는 것을 처음 간 적이 있다. 심사(心思)가 복잡하고 지쳐 있을 때였다. 때로 장소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기도 하니, 지친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 피할 곳이 필요했다.


수소문 끝에 찾아간 양평에 있는 기독교 수도원 '모새골'. 모든 전자기기를 사용할 수 없고 묵언과 기도 그리고 묵상으로 하루를 채워야 했다. 오늘 그 장소가 생각난 것은 우연히 보게 된 이 사진 때문이다. 블로그 바탕화면이기도 한, 평소 눈여겨보지 않았던 사진. 그러나 내가 아끼는 몇 안 되는 사진.


그때 모새골에서 바라본 하늘은 어찌나 청명했는지, 그 하늘을 이 사진에 그대로 담았다. 갑자기 왜 이 사진이 생각났을까. 그곳에 다시 가고 싶어서? 그때처럼 지쳐서? 말년에 한적한 수도원 같은 곳에 들어가 조용히 책을 읽으며 지난 시절을 돌아보고 삶을 마무리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다.


연말, 사람들은 송년회나 그동안 미뤄두었던 각종 모임에 참석하느라 바쁘지만, 나는 이번에는 꼭 필요한 모임 외에는 내가 나서서 모임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 조용히 침잠(沈潛)의 시간을 가질 생각이다. 사람을 만나 에너지를 얻는 사람도 있는 반면, 나처럼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활력을 충전하는 사람도 있으니, 시류에 휩쓸리거나 남의 눈치 때문에 스스로를 고갈시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거다. 이 글처럼 우리는 침묵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니까. 피정이 필요한 건 여름 한낮이 아닌 바로 지금이다.



“브라마가 무엇입니까? 스승은 말이 없었다. 제자는 스승이 못 들은 줄 알고 다시 물었다. 하지만 스승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제자는 다시 물었다. 신은 무엇입니까? 그래도 답이 없자 학생은 왜 질문에 답을 않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스승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나는 가르치고 있는 중이다.”

* 피정(避靜) :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성당이나 수도원 같은 고요한 곳으로 물러나 묵상이나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살피는 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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