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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an 05. 2023

그들의 잘못은 무엇일까

톨스토이 / 전쟁과 평화

사무실 창문으로 차량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2022년 12월도 이제 막바지, 가는 해가 아쉽고 서운해서 그런지 끝없이 이어지는 차량 행렬에 아쉬움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벌써 1년이 다 지나갔으니 그저 세월이 빠르다는 말밖에 아쉬운 마음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문장력과 표현력의 부재라니.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2권> 피예르 백작이 자신의 아내 옐린과 헤어지고 모스크바를 떠나 페테르부르크로 가는 장면이 생각났다. 그는 겉만 화려하고 아름다운 옐린에게 관심은 있었지만 결혼까지 생각하지 않고 있다가 그녀의 아버지 바실리 공작의 계략으로 뜻하지 않게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사랑한다는 확신을 갖고 결혼해도 잘 살까 말까 한데, 그런 확신이 없었으니 결혼 생활 자체가 순탄할 리 없었다. 피예르의 독백이 이렇다.




'그럼 내 잘못은 뭘까?' 그는 물었다. '네가 사랑하지도 않은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 네가 너 자신과 그 여자까지도 기만했다는 것이 잘못이지.' 그러자 바실리 공작 집에서 만난 뒤에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던 순간이 생생히 떠올랐다. '모든 일은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세상에는 겉보기에 나약해 보여도 자기 슬픔을 달래줄 벗을 찾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피예르가 그런 부류였다. 그는 혼자 마음속으로 슬픔을 되새기고 있었다. <전쟁과 평화 2권 53p - 55p에서 인용>





사랑이 없는 결혼생활에 등장하는 진부한 레퍼토리가 배우자의 부정이다. 사랑이 없어서 그런 소문이 들리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소문이 들려 그나마 있던 사랑마저도 식어버리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는 아내가 자신보다 잘 생기고 능력도 있는 돌로호프라는 남자와 바람을 피운다는 소문을 듣고 고민하다가 돌로호프와 결투를 벌이게 된다.


결과는 의외로 그가 죽은 것이 아니라 상대가 다쳤던 것. 연이은 아내의 불만과 다툼. 그는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고 아내에게 자기 재산의 대부분을 주고 모스크바를 등진다. 이혼만 안 했을 뿐이지 사실상 아내와 갈라선 것이다. 옐린 입장에서도 결혼으로 얻을 건 다 얻은 셈이다.


피예르가 옐린을 의심하게 된 건 나름의 계기가 있었지만 이들 부부의 위기는 이미 징후가 있었다. 아무리 친밀한 사이라고 해도 사소한 일로 벌어진 틈을 신속히 메꾸지 않으면 나중에는 큰 구멍이 뚫려 수습하기 어려워진다. 무엇보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깨어지면, 나아가 상대가 불편하게 느껴지면 다시 봉합하기가 쉽지 않다.


결혼해서 잘 사는 부부가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부부도 있다. 일정 기간 잘 살던 부부도 세월이 흐르면 관계가 멀어지기도 한다. 그동안 같이 산 정으로 헤어지지 못하고 형식상 결혼 생활을 하는 부부도 많다. 이미 서로에 대한 단점, 나쁜 습관 등을 경험하고 나면 몸만 같이 있을 뿐 마음이 떠나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되는 결혼 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혼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요즘 결혼하지 않고 오랜 기간 연인 관계로 지내는 남녀가 많은데, 그 관계도 다르지 않다. 황홀했던 첫 만남의 느낌은 서서히 퇴색되고 남는 건 서로에 대한 무관심. 인간의 사랑이 갖는 한계일까?


한편 세월이 흐를수록 사랑의 깊이가 더해가는 관계도 분명히 존재한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신뢰, 단점과 약점마저도 포용하고 눈 감아 줄줄 아는 너그러움, 기대는 낮추고 신뢰는 높여가는 그런 관계. 아, 그래서 나는 깨달았다. 사랑도 노력이고 의지라는 것을. 피예르와 옐린 두 사람의 안타까운 사연 앞에서 여러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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