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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an 09. 2023

상처나 슬픔에서 벗어나려면

정신의학과 의사나 심리학자들은, 상처나 슬픔을 치유하려면 감정에 휘둘리거나 무시하지 말고 감정을 객관화해 바라보라고 조언한다. 얼핏 이해는 가지만 과연 감정을 객관화하는 게 가능할지, 내가 느끼는 감정을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 솔직히 잘 모르겠고 그럴 자신도 없다.


우선 드는 의문은, 내 상처나 슬픔이 과연 나와 분리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 상처는 누구도 아닌 내 상처다. 어떻게 해야 상처나 슬픔을 이겨낼 수 있을까? 내 힘으로는 이겨낼 수 없는 것일까?


시간이 흐르면 상처에 딱지가 앉으며 아물기 시작한다. 흉터는 남지만 비슷한 상황이 생겨도 이젠 전보다 조금 더 견딜 수 있다. 흉터로 인해 비슷한 일을 겪어도 별로 아픔을 느끼지 않게 되는 것이다. 상처를 통해 그만큼 강해졌다고 할 수 있다. 하여 내 경험상, 상처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물 때까지 견디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세월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한편 그 상처를 아물게도 한다. 상처는 아무는 것이지 없앨 수는 없다. 물론 아무는 과정에서 많은 고통이 있고 굳은살이 배기도 한다. 결국 상처는 이겨낼 수 없지만 시간의 힘을 빌려 그 정도를 완화시킬 수 있을 뿐이다.


오히려 슬픈데 다른 사람들 시선을 의식해서 슬프지 않은 척, 괴롭지 않은 척하는 게 훨씬 더 힘들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슬퍼하기 곤란하면 혼자 있는 시간만이라도 참지 말고 슬퍼하는 게 그나마 덜 힘들다. 그냥 우는 것도 방법이다.


성경 시편에는 살면서 겪어야만 했던 아픔과 고통 앞에서 절규하고 괴로워하는 기자들이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다윗과 아삽이다. 그들은 괴로움이 하도 커서 하나님에게까지 토로한다. 사람에게 말했다면 부작용이 있었겠지만, 신은 그들 모두의 상처와 아픔을 너그럽게 포용해 주었다. 그렇게 그들은 때로 자신과 싸우며, 때로 신에게 불평하면서 시간 속에서 상처를 치유해 갔던 것이다. 상처는 외면하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수용해야만 그리고 기다려야만 하는 거였다.


상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먼저 상처와 싸우는 과정을 전제로 한다. 답이 없는 인생의 질문과 싸우는 것도 마찬가지로 힘든 일이다. 답이 없다고 질문조차 안 하고 살 것인가 아니면 답을 구할 수 없지만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살아갈 것인가. 선택은 우리 몫, 그러나 질문했던 사람들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질문 자체가 답이었음을. 그 질문들을 통해 자기 자신이 치유되었음을.


욥을 비롯한 성경 속의 인물들은 자신의 문제와 씨름하면서 하나님께 끊임없이 질문했던 사람들이다. 죽을 때까지 답을 얻지 못한 사람들도 부지기수, 그렇다고 그들의 질문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답이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질문 자체를 포기했던 사람들은 끝내 하나님을 등졌다. 어쩌면 그게 그들의 가장 큰 상처로 남았을지도.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아삽의 시 _ 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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