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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an 16. 2023

품 위

남아 있는 나날 / 가즈오 이시구로

“책 한 권을 소유하거나 빌리는 것, 손에 책을 드는 것, 읽어 나가면서 기계적으로 책장을 넘기는 것, 지금 시대에는 대수롭지 않은 모든 동작들이 중세에는 드물고 엄숙하며, 학문이나 재산을 많이 가진 특권층에 국한된 것이었다.” 


오늘 아침 프랑스의 중세 전문가 소피 카사뉴 브루케의 글을 읽고, 책을 읽는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과 달리 과거에는 독서는 아무나 할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었던 것 같다. 책이 흔해진 지금,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읽을 수 있지만, 스마트폰에 파묻혀, 넷플릭스에 빠져 책을 더 이상 읽지 않는다. 절실해야만 더 하고 싶어 지니 이 무슨 아이러닌지 모르겠다. 


얼마 전 책장을 정리하다가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일본 출신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カズオ イシグロ)가 쓴 <남아 있는 나날>이 눈에 띄었다. 처음에 산 책은 이미 누군가에게 주었고, 지금 가지고 있는 책은 다시 산 책이다. 

잠시 펼쳐보니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가 떠오른다. 뭐라도 읽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시기별로 읽었던 책이 다르니 갖고 있는 책을 보면, 그때의 상황이 떠오른다. 내 삶에 남아있는 그 시절의 흔적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떻게든 남는 게 인생이다. 


이 책도 그렇다. 그래서 책은 나에게 소중한 존재다. 내가 살아왔던 삶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별로 바뀐 것 같지 않다. 약간의 맷집이 생겼지만, 그것도 체념 또는 포기와 잘 구분되지 않는다. 세상일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정도에 불과하니까. 


이 책을 읽고 '직업인'으로서의 품위와 '인간'으로서의 품위가 충돌할 때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나이가 들면서 갖추어야 할 덕목이 있고, 그건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다 갖출 수 없다면 최소한으로 가져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 


나는 무엇보다도 '너그러움'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 세상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 대해서 말이다. 주인공 스티븐스도 '내 인생에서 얼마나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던가!'하고 자책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더 나은 삶을 살지 못했던 과거의 삶에 대한 회한이었으리라. 후회 없는 삶이 어디 있겠는가. 그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너그러움이었다. 


지나간 삶은 어차피 되돌릴 수 없으니 자꾸 곱씹어 자신을 학대하지 말 일이다. 잘못된 것을 고치고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야겠지만. 

“이제 뒤는 그만 돌아보고 좀 더 적극적인 시선으로, 내 하루의 마지막 시간을 잘 활용해 보라고 한 그의 충고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하긴 그렇다. 언제까지 뒤만 돌아보며 내 인생이 바랐던 대로 되지 않았다고 자책해 본들 무엇이 나오겠는가? 


내 인생이 택했던 길을 두고 왜 이렇게 못했던가 끙끙대고 속을 태운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진실되고 가치 있는 일에 작으나마 기여하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했는데....


그의 과거 행적에 비추어,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은 차지하고, 그 노력이 성과를 거둘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뒤늦게라도 변하려고 애쓰는 주인공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주인공의 쓸쓸한 뒷모습이 내 모습과 겹쳐 보여 더 이상 그를 탓할 수 없었다. 


이 책은 저자가 노벨문학상을 받기 전, 내가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로 근무할 때 검사들과 독서모임을 하면서 읽었던 책이다. 벌써 8-9년 전의 일이다. 그 책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다면 지나간 시간만큼이나 책도 바랬을 텐데. 지난 세월의 흔적을 책에서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약간은 아쉽다. 나이가 들고나니 나를 스쳐간 모든 것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책에서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부분. 저자가 직업인으로서 '품위'가 무엇인지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 


"위대한 집사들의 위대함은 자신의 전문 역할 속에서 살되 최선을 다해 사는 능력 때문이다. 그들은 제아무리 놀랍고 무섭고 성가신 외부 사건들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점잖은 신사가 정장을 갖춰 입듯 자신의 프로정신을 입고 다니며, 악한들이나 환경이 대중의 시선 앞에서 그 옷을 찢어발기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그가 그 옷을 벗을 때는 오직 본인의 의사가 그러할 때뿐이며, 그것은 어김없이 그가 완전히 혼자일 때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품위'의 요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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