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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an 22. 2023

다자이 오사무의 후지산

다자이 오사무 / 부악 백경

그제 읽었던 다자이 오사무의 <부악 백경>에 나오는 글이다. 그의 자전적인 산문이니까 아마도 그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한다. '부악'은 후지산(富士山)의 별명으로 그가 후지산이 보이는 시골에 잠시 머물 때 쓴 글이다. 




"잠들기 전, 방의 커튼을 살짝 걷어 유리창 너머로 후지를 본다. 달이 있는 밤은 후지가 창백하게 물의 정령 같은 모습으로 서 있다. 나는 한숨을 쉰다. 아아, 후지가 보인다. 별이 크다. 내일은 맑겠구나, 하고 그것만이 미미하게 살아 있는 기쁨이기에, 다시 살며시 커튼을 치고 그대로 잠이 들지만, 내일 날이 맑다고 해서 딱히 이 몸에 별다른 것도 없는데, 하고 생각하니 웃겨서, 혼자 이불속에서 씁쓸히 웃는다. 


괴로운 것이다. 일이 ― 순수하게 글을 쓰는 것의 괴로움보다, 아니, 글을 쓰는 건 오히려 내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그게 아니라 나의 세계관, 예술이라는 것, 내일의 문학이라는 것, 말하자면 새로움이라는 것, 나는 그것들에 대해 아직도 우물쭈물 고민하고, 과장이 아니라 몸부림치고 있었다.


소박한 자연의 것, 그래서 간결하고 선명한 것을 휙 하고 단번에 붙잡아 그대로 종이에 옮기는 것,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눈앞에 있는 후지의 모습도 다른 의미를 지니며 눈에 비친다. 바로 저 모습, 저 표현이, 결국 내가 생각하는 '단일 표현'의 아름다움일지도 모른다며, 조금은 후지와 타협해 본다." <다자이, 다자이, 74P 이하에서 인용>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날들, 할 것이라고 해봐야 먼 풍광을 바라보는 정도. 그런 날이 그에게도 있었고 나에게도 있었다. 그는 생각한다. 자신이 추구해야 할 문학의 세계에 대해, 예술에 대해, 그리고 세계관에 대해. 이것들이 정리되지 않고는 어떤 글도 쓸 수 없다고. 


쓴다고 해도 제대로 된 글이 써질 리가 없다. 그전까지 후지산 역시 제대로 보일 리가 없다. 때로는 거만하게 밋밋한 그저 그런 산으로 보일 뿐, 후지산이 문제가 아니라 후지산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문제였던 거다. 


결국 소박하게, 자연스럽고 간명하게 쓰자고 생각을 고쳐먹자 비로소 '후지산'은 제 모습 그대로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그는 비로소 자기가 바라본 '후지'와 제대로 타협했다고 생각하고 산에서 내려온다. 그 과정에서 그는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던가. 그 고민 없이 후지산이 제대로 보일 리가 없었고, 그가 추구하는 문학 세계가 구축될 리 만무했다.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그제 저녁, 동네를 산책하고 들어와 이 글을 읽었다. 하늘은 하루 종일 흐리고 모든 것이 정지된 것 같은 느낌, 습도까지 머금은 한기로 뼛속까지 추운 날이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고민이 느껴졌다. 


나의 '후지산'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나는 그 산을 제대로 본 적이 있는가, 나에게 묻고 또 물었다. 나는 언제 이 산에서 내려갈 수 있을까. 쉽게 말하기 어려웠다. 당장은 그의 말대로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사는 수밖에. 

"아침에 눈을 뜨고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사는 것, 나는 요즘 그것 하나만 명심하고 있습니다.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허영이나 타산이 아닌 공부를 조금씩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일만을 믿고 그때그때 자리를 얼렁뚱땅 넘기는 일도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하루하루만이 무척 소중해졌습니다. 결코 허무가 아닙니다. 지금 나에게는 하루하루의 노력이 전 생애의 노력입니다. 나는 문학을 그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믿어서 성공할 것입니다." 



<다자이 오사무 _ 사적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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