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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Mar 01. 2023

진정한 기품

서촌 산책

지난 주말, 오랜만에 서촌을 걸었다. 봄의 길목이라서 그런지 서촌과 북촌을 걷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고, 새로 생긴 카페나 커피숍도 곳곳에 눈에 띄었다. 장소적인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공간 활용의 기지와 심플한 감각이 돋보였다.


그중 골목에 있어 비교적 한적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었다. 카페의 창으로 들어오는 일요일 한낮의 햇볕이 따스했다. 카페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봄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커피를 마시고 다시 서촌을 걷는데, 한옥 형태의 지붕 위에 장독으로 보이는 항아리가 눈에 들어왔다. 맑은 하늘과 항아리를 받치고 있는 지붕이 대비되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내 작품은 엉망진창이지만 그러나 나는 큰 꿈을 품고 있습니다. 그 꿈이 너무 무거워서 휘청거리는 것이 현재 나의 모습입니다. 당신들에게는 변변치 못하고 무지하고 지저분하게 보이겠지만 나는 진짜 기품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솔잎 모양의 과자로 접대한다든지, 청자 항아리에 수선화를 꽂아서 보여줘도, 그것을 품위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졸부 취미에 불과하지요. 진정한 기품이란, 새까맣고 묵직한 큰 바위 위에 핀 하얀 국화 한 송이입니다. 흙바닥에 더럽고 큰 바위가 없으면 안 되는 거지요. 그것이 진정한 품위입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쓰가루>에 나오는 글이다. 진정한 품위는 누군가를 빛내기 위해 나를 버리는 것이다. 나를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없어지는 것이 품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품격 있는 사람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빛나는 존재로만 남을 뿐이다.


화려한 장식 위에 핀 꽃보다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핀 꽃이 더 돋보이는 법. 돋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를 돋보이게 하는 바위나 그런 변변치 못한 때로 지저분하게 보이기도 하는 바위를 선택한 국화나 기품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기품은 그런 것이다. 드러내기에 충분함에도 드러내지 않는 것, 앉은 자리가 별로라고 마다하지 않는 것, 누군가를 위해 스스로 볼품없는 모습으로 남는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문장을 떠올리며 한참 동안 지붕을 쳐다봤다. 나에게도 다자이 오사무가 말하는 기품이 있을까? 어느덧 오후 한나절이 다 가고 땅거미가 서촌 일대에 내려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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