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세계적인 음악가이자 피아니스트 류이치 사카모토, 그리고 원로가수 현미 씨의 부고를 접했습니다. 안타까웠습니다.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죽는 본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문제인 것이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에 나오는 글입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 모든 건 살아 있는 자들의 몫으로 남았습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가 되었지요.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음을 모릅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죽음은 먼 나라 이야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살아 있는 우리가 죽음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죽음이 가장 가까이 있는 상가에 가도 죽는다는 현실이 여전히 낯선 것은 그런 이유입니다. 모두 망자의 추모와는 무관하게 살아 있는 자들끼리 담소를 나누고 더 나아가 가벼운 오락을 하기도 하는 것은 모두 망자가 직면했던 죽음, 더 나아가 나도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니콜 크라우스의 소설 <위대한 집>에는 이런 글이 나옵니다.
"선생님, 수업에 역사나 수학 과학 그리고 도대체 왜 배우는지 모르겠는, 결국엔 모두 까먹어버릴 내용을 가르치는 이상한 과목들은 다 있는데, 왜 죽음에 관한 과목은 없는 걸까요? 정말 중요한 단 한 과목, 그 과목에 대해선 왜 연습도 숙제도 기말시험도 없는 걸까요?"
우리는 언젠가 모두 가야 할 길인 죽음에 대해 배운 적이 없습니다. 죽음 자체를 외면하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로 죽음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 걸까요? 아니면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산적해 있어서 관심사항에서 멀어진 걸까요? 설사 가르친다고 죽음을 알 수 있을까요?
어려운 문제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위에서 지금 주어진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사는 것뿐입니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음악을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2022년 <12>라는 앨범을 내기도 했고, 몸이 아파 기력이 없는데도 온라인으로 콘서트를 열기도 했으니까요. 그는 자신의 장례식에서 무슨 음악을 틀었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바흐의 곡이면 좋겠다. 거의 평생 들어왔으니까." 그는 아마도 죽는 순간까지 평생 삶의 목표로 삼았던 음악을 하고 싶었나 봅니다.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살아 있을 때는 별로 관심을 받지 못하던 사람이 죽으면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저도 평소 그의 음악을 듣곤 했지만, 그가 어떻게 사는지, 얼마나 아팠는지 큰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이기도 하고, 딱히 언론에 자주 등장하지도 않아서 관심을 갖기가 어려웠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무심하게 살아갑니다. 부고를 접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모두 슬퍼하지만 그도 곧 잊히겠지요.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요. 심지어 가족들마저도 그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희미해질 겁니다. 이게 우리 인간의 현실이고 실상입니다.
전도서의 기자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탄식하면서,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전도서 1:11) 우리 모두는 잊히는 존재라는 거지요. 그게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아, 인생이 이런 것이었구나! 하는 마음이 들면 이미 늦습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죽음이 뭔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한편으로 죽음을 통해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산 자에게 죽음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타인의 죽음을 통해 앞으로의 삶을 지금보다는 좀 더 농밀하고 깊이 있게 살아가야 한다는 깨달음!! 무엇보다 후회 없이...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지금 삶이 지루하거나 무의미하다고 느낀다면 동전의 한쪽 면만 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외면하고 있든지. 하여, 심리학자인 웨인 다이어(Wayne W. Dyer)가 한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Memento mori!!
우리 모두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