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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Apr 18. 2023

새벽 버스의 추억 ㅡ 델마와 루이스

벌써 오래전 일이다. 법과 대학 3학년 시절, 본격적으로 사법시험을 준비할 때였다. 사법시험은 총 3차에 걸쳐 보는데, 모든 과정이 어렵지만, 특히 2차 시험이 무척 힘들고 어려웠다. 별 기대 없이 합격한 1차 시험, 주어진 기회는 단 1번, 사법시험 준비를 위해 대학원 진학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남자들은 군 입대 문제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졸업 전까지 1년 안에 모든 공부를 마치기로 결심했다.


본격적인 2차 시험 준비, 개인적인 이유까지 겹쳐 힘든 날들의 연속, 혼자서 해야 하니 방향도 쉽게 잡히지 않고 그저 막막했다. 기본 과목인 소위 육법전서와 관련된 공부 양도 많았지만, 법 과목 이외에 다른 과목도 포함되어 있어 그 과목도 틈틈이 해야만 했다. 1년만에 해내기에는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했다.


지금은 사법시험이 폐지되고 로스쿨 제도가 도입되어 고시원 같은 곳에서 공부를 하진 않지만, 그때만 해도 신림동에 있는 고시 학원과 고시원에서 공부하는 과 친구들도 제법 있었다. 사정도 있었지만 나는 그런 곳에서 고시 공부를 하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학교 도서관에 자리를 잡았다.


도서관 자리가 지정석이 아니다 보니, 조용하고 공부하기 좋은 자리를 잡으려면 새벽 일찍 집을 나서야 했다. 새벽부터, 도서관이 닫히는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공부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별을 보고 학교에 왔다가 별을 보고 집에 돌아가는 생활. 지금 생각해 보면 공부도 다 때가 있는 것 같다. 그때는 그 생활을 어떻게 견뎠는지, 지금은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할 텐데, 하긴 그때는 절박했다.   

해가 바뀌어 한겨울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날은 추운데 이른 새벽에 일어나 학교를 가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새벽에 버스를 타면 밤새 차가운 기운이 차 안에 그대로 남아 있어 아무리 히터를 세게 틀어도 한기가 온몸에 스며들었다. 이른 새벽이라 버스에는 승객도 몇 명 없었다.  


잠이 부족해서, 무엇보다 끝도 없는 공부에 지쳐서 추운 건 둘째 치고, 버스 안 좌석에 앉기가 무섭게 어떻게든 잠시라도 눈을 붙여야 했다. 그 시간이 아니면 달리 쉴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힘든 수험 기간 내내 새벽 버스 안에서 잠시 쉴 때만큼 행복했던 기억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잠이 덜 깨 몽롱한 상태, 몸은 적당히 흔들리고, 순간 버스가 멈추지 않고 이대로 세상 끝까지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결에 하곤 했다. 단, 하루만이라도 학교가 아닌 다른 먼 곳으로 갔으면, 마치 영화 <델마와 루이스>의 마지막 장면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 그렇게 어디론가 멀리 가고 싶었다.

그때 알게 되었다. 사람이 너무 힘들면, 혹은 희망이 너무 멀리 있거나 막연하면 별로 살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의지가 약하다느니,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로 살면 되지 않느냐고 힐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딱히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꼭 맞는 말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망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다지 공감하기 어려운 비난에 불과하다. 오죽하면 죽고 싶었겠는지, 먼저 헤아려봐야 한다. 고통은 이유가 없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고난을 겪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그 이유를 찾기 마련이다. 이유 없이 고난을 당한 성경 속의 인물 '욥'이나, 억울한 상황에 처한 델마와 루이스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사람이 극한 상황에 처하면 순간적으로 나를 놓고 싶을 때가 있다는 것을, 각자 당하는 고통은 절대적인 무게를 지니고 있어 다른 사람과 비교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러니 내 잣대로 다른 사람을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을, 지금도 어디선가 힘들게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깨달았다.

미국 작가 폴 오스터는 말한다. "나는 어떤 위기를 견뎌낸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우린 그런 위기를 계기로 시험을 받는 거죠. 그런 때 우리의 존재를 정확하게 발견하게 되구요. 가령 인생이 거덜 났는데 어떻게 그것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냐,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나도 폴 오스터만큼 위기를 견뎌내고 고통을 겪어낸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다. 결핍과 고통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좀 더 성숙한 삶의 자세를 갖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젯밤 산책을 하다가 한 쌍의 남녀가 밝은 얼굴로 웃으면서 함께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즐거워서 웃었을 수도 있고, 웃어서 즐거울 수도 있고, 아무튼 좋아 보였다. 저런 모습이 끝까지 간다면, 사는 건 좋은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왜 사법시험공부를 할 때 탔던 새벽 버스의 추억이 떠올랐는지, 내 의지와 무관하게 지금도 무언가가 나를 어딘가로 데려다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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