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광준/심미안 수업
사진작가가 아니라도 우리는 곳곳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를 처음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건물에 내걸린 간판을 신기하게 바라본다. 우리는 간판이 너무 많아 지저분하다고 푸념하지만. 시선과 관심, 즉 관점의 차이다.
아무래도 처음 보는 풍경이니 새롭게 느껴지고, 새롭다 보니 더 촘촘하게 보게 되고 그 속에서 아름다움까지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늘 보는 것이라 심드렁하게 반응하는 것일테고. 사진작가 윤광준이 <심미안 수업>을 통해 한 말도 다를 바 없다.
"미적 감각이 좋은 사람들의 특징은 세상을 흘려버리지 않고 촘촘하게 본다는 거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은 차이에 민감하다. 무심한 이들은 뭘 봐도 반응을 하지 않는다. 지금 하고 있고 보고 있는 것이 그전의 것과 어떻게 다른지 모른다면, 미적인 수용이란 그저 고개를 끄떡이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심미안은 결국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이다."
내 주변에 있는 사물과 사람들을 눈여겨본다는 것은 그 대상에 관심이 있다는 말이다. 관심이 없으면 스위스에 있는 융프라우에 가도 그냥 눈 덮인 높은 산에 불과할 뿐이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오래전에 유럽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일행은 있었지만 사정이 있어 가족 없이 혼자 가야만 했다. 그래서 그런지 어디를 가도 즐겁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배낭여행을 하면서 많은 추억을 쌓았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사진을 찍는 것도 내키지 않았고, 풍광은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웠지만 그 아름다움을 마음속으로 끝내 체감하지 못했다. 지금도 그때 여행에서 뭘 얻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여행은 혼자 가는 게 아니라는 정도만 깨달았다고 할까. 한마디로 여행이 즐겁지 않았다. 그 후에도 여전하다.
나한테 언제 즐거웠던 적이 있었던가? 하고 반문한 적이 있다. 그런 적이 있긴 있었다. 아주 오래전이다. 내게 좋았던 순간에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면 다 좋았다. 뭘 봐도 즐거웠고, 싫어하는 공포영화를 봐도 나쁘지 않았다.
"특별한 공간에 누군가와 함께 들어간다면, 그 누군가도 특별하게 여겨질 게 분명하다. 아름다운 공간으로 나를 끌고 가는 사람은 나를 아름답게 여기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와 함께할 때 좋은 건물을 선택하는 것만큼 효과가 좋은 일도 없다."
그의 말도 맞지만, 나에게 특별함은 공간이나 사물이 아니다. '누가 내 옆에 있는지'였다. 어떤 사람이 함께 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심한 편이다. 주체적이지 못하다고, 의존적이라는 비난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그러니 삶이 무료하고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원인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다.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기도 어렵지만, 그 사람과 언제까지나 함께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앞으로 개선될 가능성도 별로 없어 보인다.
주변 환경은 별로 바뀐 것이 없는데 암 진단을 받고 바라보는 하늘과 그렇지 않을 때 바라보는 하늘이 다르다. 사람은 절박하지 않으면, 충격이 없으면 자기 외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 보면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뒤늦게 깨닫고 후회한다.
세상 모든 것이 이렇게 아름다웠는지 그때는 몰랐다고. 다시 태어나면 이 아름다운 세상을 제대로 살아보고 싶다고. 그러나 시간은 언제까지나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도.
그런 의미에서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심리안을 가졌다면, 우리는 유한한 생을 한 번 더 사는 셈이다. 나는 생을 다시 살 수 있을까... 오늘 들었던 생각이다.
"아름다움을 파악하고 경험하게 되면, 스스로의 인식과 판단의 범위가 다음 단계로 올라서게 된다. 무용한 것이 유용한 가치로 바뀌는 행복의 선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순환의 시간들을 갖게 되면, 삶이 지루할 틈도 괴로울 틈도 없다."
<윤광준 _ 심미안 수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