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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May 25. 2023

한계를 인정함으로써 한계를 넘어서는 것

퇴근 무렵이었습니다. 하던 일을 정리하고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펼쳤습니다. 머리가 복잡할 때 시집처럼 종종 읽는 책입니다. 어디를 읽어도 마음이 아려오는 문장들 앞에서 잠시 시름을 잊게 해 줍니다.


시마무라가 기차를 타고 눈의 고장으로 가는 그 유명한 첫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요코를 만나는 장면입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건너편 자리에서 처녀가 다가와 시마무라 앞의 유리창을 열어젖혔다'


그는 설국의 풍경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다가 신호소에 멈춰 선 기차 유리창을 통해 요코가 역장에게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됩니다. 요코는 역장이 있는 역에서 일하게 된 동생을 잘 도와달라고 부탁합니다.


"역장님, 동생을 잘 돌봐 주세요. 부탁이에요." 시마무라는 생각합니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높은 울림이 고스란히 밤의 눈을 통해 메아리쳐 오는 듯했다.'


시마무라는 요코의 간절한 목소리가 높은 울림이 되어 밤의 눈을 통해 메아리쳐 오는 듯했다고 합니다. '밤의 눈을 통해 메아리쳐 오다' 저도 이 문장을 여러 번 읽으며 요코의 심정을, 시마무라의 요코에 대한 첫 느낌을 마음으로 읽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문장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느낄 수 있게 한다면 작가는 성공한 것입니다. 제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이 소설을 종종 읽는 이유입니다. 메마른 마음이 순간 먹먹해졌습니다. 그리고 또 이런 문장을 읽었습니다.


“아득히 먼 산 위의 하늘엔 아직 지다만 노을빛이 아스라하게 남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먼 곳까지 형체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색채는 이마 다 바래고 말아 어디건 평범한 야산의 모습이 한결 평범하게 보이고 그 무엇도 드러나게 주의를 끌 만한 것이 없는 까닭에, 오히려 뭔가 아련한 커다란 감정의 흐름이 남았다.”


눈을 감고 상상했습니다. 기차 창을 통해 바라본 풍경, 온통 눈으로 뒤덮인 그래서 모든 것의 형체마저도 눈 속에 파묻힌 고장, 노을만이 남은 해질녘의 저녁. 그렇다고 눈에 띄는 풍경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경치. 그곳을 기차를 타고 지나가는 시마무라. 왠지 제가 시마무라라고 해도 그 풍경 속에서 우연히 본 요코에게 연정을 품게 될 것만 같았습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상황이나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사람을 상상할 수 있는 것, 독서가 주는 유익입니다.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 우리는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할 수 없지만, 책은 이 한계를 넘어서게 해 줍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삶이 한계가 있다는 것, 그 삶 속에서 살아가는 유한한 인생인 나의 한계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한계를 인정함으로써 한계를 뛰어넘는 것, 어쩌면 시마무라가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눈의 고장으로 갔던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설국>을 읽었던, 지금도 읽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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